[편집자주] 대한민국은 혐오와 배제, 차별의 풍조가 만연하고, 각종 극우적 정치 문화가 학생들 사이에 퍼져 가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제약으로 교육자로서, 어른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대체 왜 교사들은 이렇게 ‘중립’이라는 미명 아래 입을 닫고 있어야 할까? 정치 기본권 없는 교사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기 위해 한국 현대사 박사 1호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서 교수는 최근의 12.3 비상계엄, 6.3 지방선거, 배재고 사태 등의 일련의 사회 현상을 보면서 이런 시대에 뭐라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①] 민주 시민 교육, 현대사에서 길을 찾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②] 쿠데타에 짓밟힌 교원노조와 학교를 삼킨 혐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③] 연속인가 단절인가, 3공과 유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④] 침묵하는 교실, 역사 왜곡 바로잡을 교권이 필요하다
유준선: 보통 세간의 사람들이 흔히 박정희 시대라고 합쳐서 얘기를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그건 옳은 해석이 아니다, 유신독재와 제3공화국 시기는 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중석: “제3공화국과 유신 시대가 같은 시대의 연속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현대사에 무지한 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에요. 제3공화국도 모르고 유신 시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개발 독재라는 말도 그래요.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제3공화국과 유신 시대가 같다는 주장은 자신들의 이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억지를 부린다고 나는 봐요.
왜냐면 베트남 특수가 있었던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 때부터 경제 발전이 많이 된 거거든요. 경부고속도로 개통도, 포항종합제철 기공식도 다 이때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3공화국 시절에 퍼센트로 보면 높은 경제 성장을 한 게 분명해요. 유신을 맞이해서 경제 성장이 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동건설특수와 해외경제 호조, 중화학 투자로 1976, 77년에 높은 경제성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신 체제가 꼭 경제개발에 필요한 건 아닌 거예요. 오히려 유신 말기에는 중화학 중복과다투자, 제2차 석유파동 등으로 우리 경제가 멍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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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10월 18일 조선일보 기사. 이른바 10.17 유신 쿠데타를 보도하고 있다.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선포하면서 그 취지로 중화학 공업 발전이라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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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를 주장하려면 “제3공화국이나 유신 시대나 다 경제가 발전했는데, 다 권위주의 시대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자기 자신들을 합리화시킬 수가 있는 거예요. ‘다 권위주의 시대다’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지 못하고 그런 주장만 한 거지요. 나는 그 사람들 중 일부는 비록 내 책을 안 봤어도 제3공화국과 유신 체제를 같은 것으로 본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금은 생각할 거라고 보고 있어요. 다만 그걸 배운 사람들은 지금도 뭐가 뭔지 모르고 그 말을 애용하고 있어요. 그만큼 현대사가 교육이 너무 안 됐고 잘못된 거예요. 용어 중에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도 이현령비현령이에요. 어디까지가 권위주의인가요. 예컨대 지금 미국의 트럼프 정치는 권위주의냐, 아니냐, 이것도 따져볼 수가 있어요. 프랑스에서도 그런 논란이 나왔어요. 제3공화국 시절에도 박정희가 권위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면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제3공화국과 유신 체제는 판연히 달라요. 내가 그 시대를 양쪽 다 살면서 학생운동을 했어요. 3공에서도 학교에서 잘리고 유신체제에서도 잘렸어요. 하여튼 그 두 시기에 박정희 비판을 참으로 많이 하고 다닌 사람이 나에요. 김대중은 1970년대 유신 시대에 그런 얘기를 많이 했고 그 이후에도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는 특별하게 지금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 헌법이 제3공화국 시대로 돌아가면 되는 거다.” 그랬어요. 김대중, 그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한 얘기예요.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요. <제3공화국 헌법>은 <제헌헌법>, <제2공화국 헌법>, 지금 <헌법>과 비슷해요. 이렇게 4개 헌법은 상당히 민주주의 헌법이고 비슷한 거예요. 사실 <제3공화국 헌법>은 지금 <헌법>과 내용을 놓고 보면 아주 유사해요.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는 다 국민이 하는 거예요.
1963년, 67년, 71년 세 차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그다음에 유신으로 가는 거니까요. 1971년 대통령 선거가 박정희한테 큰 충격을 주었어요. ‘내가 그렇게 엄청난 돈을 썼는데’, 1971년 국가 1년 예산의 10%가 넘는 걸 선거 자금으로 썼잖아요. 여기저기서 얼마나 많이 염출했어요. 하여튼 간에 ‘이런 선거를 다시는 해서는 안 되겠다’ 이런 마음을 박정희가 갖게 할 만큼 용호상박의 싸움이었고, 김대중은 장충단 유세에 모여든 인파를 보고 집권하는 줄 알고 그런 연설까지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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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선거 유세를 진행하면서, 공화당이 부정선거를 강행한다면 제2의 4.19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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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도에, 물론 나중에 보니까 영호남이 지역 표차가 커서 박정희가 이기긴 했지만 94만여 표 차이가 났어요. 박정희와 윤보선이 벌인 첫 번째 싸움에서도 윤보선이 15만 표로 진 거예요. 그 개표가 끝나기 몇 시간 전까지는 윤보선이 이긴 줄 알았어요. 나도 그때 열심히 들으면서 "윤보선이 이기네" 그랬거든요. 다시 말해서 그 선거가 특별히 잘못된 선거 아닙니다. 국회의원 선거도 마찬가지예요. 헌법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유신헌법>은 달라요. 예컨대 국회를 봐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해요. 박정희가 추천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통대)들이 후보자 ‘전체’에 대해 일괄 찬반투표만하는 거예요. 통대는 중앙정보부 휘하에 있는 건데, 그야말로 어용 집단들인 거죠. 그러니까 박정희가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지역 선거는 그전의 단일 선거구를 바꿔가지고 한 지역구에서 2명씩 뽑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특히 1971년 총선을 보면 도시에서 야당이 휩쓸고 있었거든요. 서울에서 19개 선거구에서 18개를 야당이 차지했어요. 대구에서도 5석중 야당이 4석을 차지했다니까요. 1971년 선거, 무서운 선거입니다. 1971년 선거를 보고 박정희가 정말 놀랐어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둘 다요. 그러니까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택한 거예요. 그럼 전국적으로 공화당은 다 한 석을 차지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의석은 무소속도 출마를 허용했기 때문에 야당이 싹쓸이하지 못 해요. 그러면 항상 박정희 쪽이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게 돼요. 박정희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국회 국정감사권도 없어졌고 회기도 줄여버렸죠. 야당은 통제 받았죠. 결국 국회라는 게 힘이 없고 박정희가 하라는 대로 종속되게 되었어요. 그래도 야당이라는 게 있다는 자체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 두려울 수는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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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홍보하는 대한뉴스 영상. © 대한뉴스 9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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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법원, 1971년 사법부 파동 이래 법원은 예속의 길을 계속 갔어요. <유신헌법>에 의해서 대법원 판사, 대법원장뿐만 아니라 모든 법원 판사들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재임명도 대통령이 다 하는 거예요. 모든 인사권을 대통령이 쥐고 있으니까 긴급조치 재판에서 유신권력이 하라는 대로 판결 내릴 수밖에 없어요. 형량도 그 유명한 정량제잖아요.
그러니까 삼권 분립이 안 되고 일권 체제인 거예요. 대통령은 우선 박정희 1인 독재 체제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게 다른 사람은 대통령 후보로조차 나오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어요. 통대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는 박정희 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99.9%가 나와요. 대통령은 박정희만이 할 수 있어요. 모든 권력은 박정희 1인한테 집중돼 있는 그런 체제였어요.
다른 나라 파시즘하고도 좀 차이가 나요. 파시즘이라고 꼭 한 사람한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건 아니거든요. 제5공화국(전두환 신군부 체제)의 경우 제일 큰 차이는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한 점이에요. 원래 헌법을 만들 때는 6년이었는데 전두환 의견이 들어갔겠지요. 그러나 12.12 쿠데타 5.17 쿠데타가 전두환 혼자 한 게 아니에요. ‘투허’라고 하는 두 명의 허가 성을 가진 대령을 포함해서 여러 군인들이 참여한 거죠. 그러니까 권력을 한 사람이 계속 누릴 수는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7년 단임제로 나타난 거죠. 뽑는 방법도 형식상으로는 여러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게 만들어 놨고 선거인단도 크게 늘려놨어요. 그래서 국민들이 불평하고 있었던 유신 체제에 대한 반감을 완화시키려고 그런 꼼수를 좀 쓰기도 했어요. 국회 해산권은 유신 체제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갖고 있었지만 전두환 신군부 체제는 단서가 붙어 있어요. 물론 유신 체제도 단서가 있지만 제5공화국과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국회의원의 경우도 제5공화국 때는 대통령이 3분의 1을 임명하는 건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어요.
유신 체제에서 국민은 주권을 제약받았고,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라는게 어용기관, 허수아비 기관임에 틀림없는데, 눈곱만큼도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닌데도 헌법기관임과 동시에 주권적 수임 기관이에요. 유신헌법에서 주권적 수임 기관으로 명시했어요. 대통령 외에도, 형식적으로는 국회의원을 ‘일괄’ 선출할 수가 있고 또 헌법을 개정할 수 있고 여러 가지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어요. 어쨌든 제5공화국이 되어서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으니까 대신에 한 선거구에서 2명 뽑는 중선거구제는 그대로 두고 전국구를 여당에 유리하게 바꿔놨어요. 국회의 권한도 부분적으로 좀 회복을 시켜 놨어요. 사법부도 유신 체제보다는 나아져요. 대법원 판사는 여전히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법원 판사들은 대법원장이 임명해요.
유신체제에서 제일 무섭고 악랄한 것이 긴급조치에요.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여러 차례 선포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유신체제를 유지했지요. 유신체제는 긴급조치체제로도 불렸어요. 나중에 대법원은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려요. 워낙 권력 남용의 악명이 높으니까 전두환·신군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없앴어요.
유신 체제는 유신 잔당을 심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라고 나는 봐요. 유신 체제 같은 그런 극단적인 체제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제5공화국이라는 소위 전두환 신군부 체제가 나타나냐 이 말이에요. 그런 건 꿈도 못 꾸는 건데 박정희가 이미 선례를 만들어 놨으니까 전두환은 좋다고 그걸 따라갔죠.
언론 자유도 그래요. 특히 긴급조치 9호가 심했죠. 긴급조치 9호는 1975년부터 박정희 죽을 때까지라고 했잖아요. 예컨대 부마항쟁이라는 엄청난 시위가 부산에서 일어나서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쳤고, 그래서 한밤중에 김재규가 현장에 갔다 오죠. 그러면서 박정희, 차지철을 만나면서 그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듣고 (저격할) 결심을 하게 되는 건데 하여튼 부마 항쟁에 대해서 부산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귀 눈 입을 다 틀어막는 긴조 9호 때문에 그래요. 일체 시위에 대해 알리지 말 것, 보도뿐만 아니라 알리는 게 다 금지였어요. 그래서 이미 군대는 그 전에 가고 있었지만 비상계엄이 10월 18일 0시를 기해서 선포되고 나서야, 그건 국가적인 큰 선포니까 그거는 보도가 됐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부마항쟁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다음부터 또 보도를 제한했어요. 부마항쟁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다가 갑자기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안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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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 항쟁으로 인한 부산 지역 비상계엄 선포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박정권은 부마항쟁을 대학생 등의 소란이라고 원인을 지적하면서 불순분자 경거망동 발본과 같은 자극적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사이드 기사에서 신민당은 이에 대해 정부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공박하고 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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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유신 시대의 언론 자유하고 전두환 체제에서의 언론 자유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고 나는 봐요. 전두환 때 언론 통폐합이 있었지 않느냐, 그건 맞죠. 사실 그대로니까. 박정희도 5.16 쿠데타 일으켰을 때 대대적인 언론 통폐합을 했죠. 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전두환 때 보도 지침이라는 것은 보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보도를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유신 후기에는 아예 보도를 하지 말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도 일본 문화원에 가서 일본 신문들을 뒤적거려야 ‘한국에서 무슨 사건이 났었네’, ‘어디서 데모했네’ 이런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언론의 자유라고 그럴까, 보도 면에서도 양자(유신, 5공)는 차이가 상당히 있고 제3공화국하고는 아주 달라요. 나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의 신문들하고 10.17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의 신문들을 봐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양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10.17은 그야말로 박정희가 하라는 대로 보도가 된 거예요. 거기에서 유신 찬양 표어로 이런 걸 내걸어라 하면 그대로 신문마다 그걸 1면에 내걸어야 돼요. 사설도 그렇게 쓰고요. 그런데 5.16 때는 달라요. 나는 4월 혁명의 뜨거운 열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거지만 언론에서 상당히 박정희 쿠데타 세력을 비판하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 어떤 책을 쓰고 그랬지요. 시기마다 차이가 나는 거예요.
박정희 언론 탄압도 1964년 비상계엄을 선포할 때, 6.3 비상계엄이지요. 그때부터 조금 강화되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특히 삼선 개헌 이후에는 더 강화됐고 1971년 이후에 더 강화되다가 유신 체제로 가는 거지요. 내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처럼,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는 4월혁명이 일어난 지 1년밖에 안 되어서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고, 박정희 권력도 여러가지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박정희의 권력 장악 강도가 해가 갈수록 커지다가, 변란을 일으켜 유신체제 같은 것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거기에 1971년의 대선 총선을 겪으면서, 군을 동원해 유신쿠데타를 일으킨 거다, 이렇게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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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교수는 박정권 때 자신의 학생운동의 경험을 짚으며 제3공화국 체제와 유신 체제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 유준선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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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 하나만 보더라도 그래요. 제3공화국 때 나도 여러 번 참여했지만 1964년에 그 큰 데모들 6.3사태에 이르는 그것들은 독자적으로 했어요. 학생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라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중앙정보부가 사찰을 하고 그러지요. 그 이후에 학교에 형사가 배치되거나 중앙정보부에서도 사찰을 했지만 직접적으로 학교 안에 경찰들이 막 들어오거나 하는 건 없었어요.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데모하고 거리로도 나갈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유신 체제에서는 그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학교는 그야말로 병영화되어 있었어요. 어디서건 감시의 눈이 번뜩거려 몇 사람이 모이면 벌써 달려와요. 사실은 교수조차도 감시하는 일을 맡겼어요. 그런 세상이었어요.
그래서 5분 투쟁이라는 게 그때 있었어요. 유신 후기에는 주로 그런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형사들이 오기 전에 5분 안에 재빨리 유인물을 뿌려야 해요. 유인물을 다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읽었으면 좋겠다,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거죠. 어차피 감옥 가는 거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도서관 난간이나 특별한 데 몸을 메어놓고 그렇게 몇 분 동안 버티면서 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다 감옥에 가지요. 근데 제3공화국 때는 감옥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숫자가 적었어요. 구호도 전혀 달랐어요. 제3공화국 시대에는 “헌법이 잘못됐다.” 이런 구호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어요. “한일 회담 반대한다” “한일 협정 잘못된 협정이다.”, “삼선 개헌 반대한다.”, “교련 반대한다.” 이런 구체적인 것들이에요. 그런데 유신 체제에서는 구호가 ‘유신 체제 타도, 유신헌법 폐기’ ‘박정권 타도’ ‘유신정권 타도’ 여기로 모아져 있어요. 정면으로 박정권과 싸우는 거예요. 박정희 정권도 유신반대 시위 관계자들을 용공세력 내지 공산주의 세력으로 몰아세웠지요. 그러니까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 양자는 비슷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10.26 이후에 서울의 봄을 맞이하면서 공화당과 신민당이 헌법을 만들 때 <제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사실상 기본 원칙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양쪽이 합의를 본 거죠. 헌법의 구체적인 것까지도 양쪽이 합의를 많이 봤어요. 그걸 가지고 이제 새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그 이전에 계엄을 해제하려 했어요. 첫 번째 과제가 계엄해제고 개헌은 그 다음이었어요. 1980년 5월 12일 여야는 17일에 임시국회 소집 공고를 하고 20일부터 국회를 열기로 결정했어요. 그 5월 17일에 쿠데타가 일어났죠.
유신 체제는 전두환 신군부 체제하고도 차이가 있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극단적인 일인 권력체제에요. 독재국가도 헌법에 일인독재체제를 공공연히 내세우지 않잖아요. 그 시대는 정말 살벌한, 잘못된 시대였어요.
[마지막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