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한민국은 혐오와 배제, 차별의 풍조가 만연하고, 각종 극우적 정치 문화가 학생들 사이에 퍼져 가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제약으로 교육자로서, 어른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대체 왜 교사들은 이렇게 ‘중립’이라는 미명 아래 입을 닫고 있어야 할까? 정치 기본권 없는 교사들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기 위해 한국 현대사 박사 1호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서 교수는 최근의 12.3 비상계엄, 6.3 지방선거, 배재고 사태 등의 일련의 사회 현상을 보면서 이런 시대에 뭐라도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①] 민주 시민 교육, 현대사에서 길을 찾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②] 쿠데타에 짓밟힌 교원노조와 학교를 삼킨 혐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③] 연속인가 단절인가, 3공과 유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④] 침묵하는 교실, 역사 왜곡 바로잡을 교권이 필요하다
유준선: 그러다가 4.19가 일어나면서 이승만이 4월 27일에 하야하게 되지 않습니까?
서중석: 4월 26일 하야한다고 성명을 내고 27일날 국회에서 수리해요. 27일이 어떻게 보면 더 정확한 날짜죠.
유준선: 그래서 4.19 혁명 이후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최초의 교원노조 설립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와 오늘날 전교조가 되새겨야 할 지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중석: 4월 28일 대구에서 교사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제자들한테 낯을 못 들게 되는 행위를 한 것을 반성하면서 우리들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역할을 하도록 나서겠다고 해요. 그러면서 교원 노동조합을 만드는 작업에 앞장을 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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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원노조, 민주학원 새질서로"라는 1960년 5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기사문에서는 "교직자의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라는 기치를 들고 모여든 전국 초중고등학교 교원과 대학교수등 약 삼백명은 22일 2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운동장에서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를 결성하였다."고 머릿글을 뽑고 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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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내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부산이라든가 경상도 전체가 움직였어요. 다른 지역은 훨씬 소극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전체의 4분의 3이 경상도 지역이었어요. 경상도가 50년대에는 그랬어요. 하여튼 열화와 같이 교원 노조 운동이 번지니까 바로 허정 과도 정부에서도 이병도(역사학자)가 당시 문교부 장관을 했는데 교원노조를 용납할 수가 없다 해서 교원 노조 만드는 걸 저지하려고 해요.
그 후 8월 23일 장면 정부가 출범하는데 8월 25일 대구고법이 교원 노조를 만드는 것 자체는 인정을 해야 한다, 만드는 것 자체는 인정한다는 것으로 판결을 했어요. 그런데도 장면 정부는 꼼수까지 써가면서 어떻게든지 교원 노조 자체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특히 경북 지방에서 단식 투쟁을 대단한 규모로 했어요. 교사들이 많이 쓰러졌고 그것이 그때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고요. 그래 가지고 할 수 없이 장면 정부가 교원 노조 자체는 인정하게 되지요.
그런데 1961년으로 들어가면서 혁신계(진보정당)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해요. 1960년 7.29 선거 때도 아주 형편없었고 혁신계가 제대로 진출을 못했어요. 12월에 걸쳐서 몇 차례에 걸쳐 치러진 지방자치 선거에서도 혁신계가 너무 약했어요. 그런데 1961년에 들어가면서 혁신계가 상당히 대중적 지지를 받아요.
제일 큰 것은 통일운동이죠. 한국인들이 열망하는 통일운동을 혁신계에서 강하게 얘기하니까 대중들이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3월이 되면서 3, 4월 위기설이 돌죠.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소문이 돌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쪽에서도 직접 위기설을 퍼뜨렸어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게 하려고 그랬죠. 그래서 학생들이 4.19 1주년을 맞아서 시위를 신중하게 했어요. 4월 19일에 마스크를 쓰고 침묵시위라는 걸 했죠. 그런 식으로 조심하고 그랬어요.
장면 정부는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겁을 먹었어요. 장면 정부도 원래 단정 운동 세력으로, 이승만과 같이 단정 운동을 폈던 사람들이잖아요. 장면 세력을 관료 세력이라고 부르죠. 1960년 11월 1일 서울대에서 민통련(민족통일연맹) 발기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 기성세대는 분단의 책임을 지라고 비판하고, 장 총리는 미국과 소련을 방문하라는 등의 주장을 한 것은 보수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지요.
학생들이 통일운동을 세게 펴고, 혁신계가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자 장면정부 등 보수세력은 <데모규제법>, <반공 임시특례법>을 만들어 대응하려고 하지요. 이게 나중에 다 쿠데타 정권에 의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반공법>이 되는 거예요. 옛날 민주당 구파 세력, 이때는 이름이 신민당으로 바뀌었지만 윤보선 대통령도 그쪽인데 두 법을 만드는데 지지해요. 극우 보수 단정 세력 모두가 지지하는 거예요. 통일운동 세력의 움직임을 보면서 ‘이거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두려움을 가졌거든요.
그런데 진보 세력은 통일운동에 대중들이 호응하는 것을 보면서 “됐다. 강하게 밀고 나가자!” 하면서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벌여 나가요. 그렇지만 그 당시에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데는 교원노조를 제외하면 많지 않았어요. 혁신계 정당 중에는 몇십 명밖에 모이지 못하는 데도 있었어요. 그만큼 혁신계 조직이라는 게 약했어요. 그러니까 교원 노조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경우가 생기게 된 것이지요. 특히 대구·경북 쪽의 교원 노조가 많은 역할을 했어요.
이 부분을 놓고 이제 어떻게 볼 것이냐, 이런 문제가 있지요. 그렇게 힘들게 싸워서 노조를 만들었는데, 얼마 안 있어 정치 투쟁의 한가운데에 나서게 돼버렸는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지요. 교원 노조 간부 쪽에서 주장하는 것에는 설득력이 있었어요. 시위를 규제하고 또 시위하는 사람을 반공법으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못하게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싸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다, 이런 주장은 상당히 어필할 수 있는 면이 있었죠.
그런데 또 생각해야 할 것은 그걸로 인해서 교원노조가 큰 타격을 나중에 입었다는 거예요. 예컨대 이목이라는 분이 있어요. 두툼하게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4월혁명기를 중심으로>를 썼잖아요. 그 책을 보면,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에 2천 명이 체포되어 용공세력으로 몰렸는데 그중 1천 5백 명이 교원 노조 관계자였다고 해요. 그리고서 이른바 혁명 재판이라는 걸 쿠데타 정부에서 하게 되는데 그 혁명 재판에서도 교원 노조의 중요 인사들이 중형을 많이 선고받았어요.
김문심, 이분은 무기징역을 받았고 강기철, 이분은 15년, 신동영, 이목, 이 두 분은 10년, 이종석, 7년 해서 당시 혁신계 중요 인사들이 받은 형량 못지않게 중형을 선고받았어요. 그래서 형을 전부 다 산 건 아니지만 상당히 오래 옥중 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나서 교원 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을 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에요. 이십 몇 년 간 교원 운동이 일어나질 않았어요. 그게 물론 2대 악법 반대 투쟁 때문만인가, 또 그게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도 사실은 불확실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간에 큰 타격을 입혔어요.
그런 것들이 심리적으로 일정한 기간 영향을 주었죠. 사실 여러 가지로 평가를 해볼 수 있지 않느냐, 2대 악법 투쟁에 적극 참여한 것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는데 어디에다가 더 비중을 둘 거냐, 이런 건 더 좀 생각해 봐야 될 것 같네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유준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통일 교육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우리 사회가 과거에는 통일이라는 것이 국민적이 호응과 지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아이들에게 통일 얘기를 하면 잘 받아들이지 않아요. 심지어는 통일 안 했으면 좋겠다고도 하고요. 선생님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서중석: 역사는 변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 서울대생, 주요 대학 대학생들 다수가 일베적인 사고에 빠져 있다는 게 더 무섭다고 봐요. 12.3 내란이 일어나면서 내란 규탄 시위가 일어나고, 호헌 투쟁이 벌어졌는데 거기에 서울대생이나 주요 대학 대학생들이 별로 참여를 안 했잖아요.
그게 더 먼저 풀어나가야 할 무서운 문제죠. 그게 더 무서운 일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우리 사회가 왜 학교 교정이 역사 왜곡·혐오에 그렇게까지 물들어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걸 따져보는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봐요.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도 12.3 내란을 지지하는 자를 투표하고 이번 지방 선거에서도 그런 일을 또 했어요. 이런 게 훨씬 더 직접적인 문제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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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교수는 오늘날 젊은 층이 갖고 있는 잘못된 역사 인식과 혐오의 정서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 유준선 편집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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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문제도 그전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는 점에 직면해 있는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가 중요하다고 봐요. 이런 것은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느낄 수가 있었어요. 80년대까지는 80% 이상이 ‘통일은 꼭 해야 한다’라는 쪽으로 여론조사가 나왔지만 90년대 초부터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나오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어떨 때는 ‘통일 안 했으면 좋겠다’라는 초등학생들, 아이들 의견이 50%를 넘었다고도 나오고 그랬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어요. 두 가지에요. 하나는 우리 세대, 어쩌면 전교조 세대까지도 포함이 될 것 같은데 통일을 절대적인 걸로 봤어요. 근데 그건 생활하고도 관련이 있어요. 우리 역사가 평양과 서울이 분리된 역사가 있어 본 적이 없어요. 언어도 똑같은 거 쓰고 하나의 국가로 가는 게 너무 당연해요.
그런데 6월 항쟁 이후에 초등학교 들어가기 시작한 애들 또는 중학생 또래들은 남북이 갈라져 있는 게 너무 당연하게 보이죠. 사실 강만길 선생이 1975년,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는 분단시대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명확히, 그리고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라고 역설했어요. 분단 시대의 역사 인식이라는 걸 처음 얘기를 했는데 그때도 분단 세력은 분단시대가 당연한 것이고 구태여 통일문제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만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강 선생이 그러한 분위기에 그렇게 외쳤고, 그 무렵부터 통일 운동이 새롭게 떠오른 거죠.
그러나 지금 젊은 세대들은 분단 세력, 단정 세력과는 또 다르게 자기들 세계가 펼쳐지는 건데 거기서는 통일돼야 할 이유가 머릿속에서 찾아지질 않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남북이 사이가 좋으냐면 그렇지도 않고,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는데 뭐 하러 통일하자고 하느냐는 생각이 많다고 하죠.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잘 해가지고 드디어 6.15 공동선언도 하고, 우리 세대는 참 감격스럽게 평양을 가고 그랬어요.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평양이 감격스럽지 않지요. 그전에 90년대 초에 우리가 백두산을 갔을 때 “저 천지 물, 보통 물이 아니다. 백두산의 이 돌, 우리 돌이다.” 그러며 울기도 했어요. 그것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시대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한테 강요해선 안 되고 이해하도록 해야 된다고 봐요. 북에서 몇 년 전인가부터 우리는 각각 따로 국가를 갖고 있는 거라고 해버렸단 말이죠. 통일되어야 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 말이지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나와 있는 걸 거부한 거예요. 그것도 지금 나이 먹은 세대하고는 다르게 김정은 남매는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느끼는 것과는 다른 세계를 갖고 자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거기다가 자신들이 길게 의존해서 살 수 있는 것은 중국, 러시아지, 남한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데고, 미국한테는 언제 어떤 식으로 된통 당할지 알 수 없고, 일본도 정말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남북이 따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 남북 관계 때문에 북이 흔들리는 것도 막을 수 있고 여러 가지 강점이 있단 말이죠. 그러면 과거에 북에서 그렇게 눈물 흘리며 강렬하게 통일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문제가 남는 거죠.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것도 나이 든 세대들이 많이 하고, 20~30대는 적고, 1980-90년대에 생긴 단체도 그 세대가 드문, 나이 먹은 예전 사람들이 여전히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한국은 근대 이후에 지독할 정도로 세대 전쟁이 있어 왔는데 그 세대 전쟁이 그래도 21세기 초까지는 내면에 근대적인 인간관, 역사관이 깔려 있었다는 점에서 연속적인 면이 더 컸던 거예요. 근데 그게 근래에 와서 그것과 다르게 전개되는 면이 더 커지는 식으로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는 거 아니냐, 다른 나라와도 차이가 있게 새로운 인간형도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들 때가 있어요. 일베적인 사고중 일부는 너무 잘못된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이 가져야 할 상식이나 양식을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건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정의관, 가치관,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결여, 결핍된, 이상한 혐오에 물들어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런 점, 저런 점들에 대해서 젊은 남성들에게 호령해서 될 일이 아니죠. 그러나 가만히 손놓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선 냉정하고 공정하게 사태나 상황을 파악하려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정부에서는, 교육부도 마찬가지고, 해봤자 별로 그렇게 소득이 나올 게 없고 시간만 많이 걸리고 복잡하기만 할 것 같으니까 아예 얘기를 꺼내지도 않아요. 나는 그런 문제를 제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이 인터뷰에 임한 거예요.
유준선: 4.19 혁명에도 불구하고 5.16 쿠데타, 제3공화국 출범 등의 일련의 흐름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합니다. 이 시기 교사, 공무원들의 삶은 이승만 시기로 돌아간 것으로 봐야 할까요?
서중석: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해요. 5.16 쿠데타 이후에 초·중·고교 교사들이 부쩍부쩍 늘어나죠. 그거는 이 시기에 인구도 아주 많이 늘어났지만 교육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훨씬 더 증가했기 때문이에요. 예컨대 1970년대에 가면 여성들도 다 여고에 들어가요. 그래서 남성과 거의 같은 숫자가 여고에 들어가는 걸 볼 수가 있거든요. 그만큼 교사 숫자가 늘어났어요. 그런데 교사들의 위치는 얼마만큼 더 좋아졌느냐 하면 그렇진 않아요.
우리나라 정치가 유신 시대(1970년대)에 와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거와 비슷한 거지만 교사들은 자유당 정권 때보다도 유신 체제에 들어가면서 훨씬 더 심하게 동원되는 그런 현실에 부닥치게 돼요. 그 가운데는 혐오나 증오, 공포심, 잔인성 이런 것들을 키워주는 비인간적·반교육적인 것들도 적지 않았고, 특히 이 점에 각별히 유념해야 하는데, 역사 왜곡이 아주 엄청나게 심했어요.
1960년대는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닌 시절인데 1964년 서울에 올라와서 고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제3공화국 시절이죠, 나는 두 번 동원된 기억이 나요. 하나는 존슨 미국 대통령이 오는데 서울역 부근에서 열을 지어 박수를 친 그런 동원이 있었어요. 그다음에 먼지가 풀풀 나는 모래의 땅이었는데 여의도에서 최초의 지상군 부대인 맹호 부대가 월남으로 떠나는 것을 학생들이 환영하는 데 동원이 됐더랬어요. 그거 빼고는 뭐 기억나는 게 특별한 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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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장병들이 국민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베트남으로 파병을 떠나고 있다. © 대한뉴스 제5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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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때처럼 ‘북진통일, 반공·방일’ 외치고 그런 걸 담벼락에 써 붙이고 하는 것도 없었고 1960년대는 비교적 그냥 잔잔하게 넘어갔어요. 그렇지만 사실은 <국민교육헌장>이 1960년대 말부터 강요되고 하면서 박정희의 억압적 정권 출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전 포석 같은 것들이 출현하게 되지요. 그런 것 가운데는 유신 쿠데타 직전에 교련 교육이 대폭 강화됐다는 점이 있어요.
1970년대에 들어와서 10.17 유신 쿠데타로 유신 헌법이 출현하고 유신체제가 등장을 하게 되죠. 유신 체제 전반기에는 반유신투쟁, 김대중납치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나요, 그러면서 유신체제가 흔들리지요. 그렇게 되니까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1975년 봄부터 유신 체제 강화를 위한 전반적인 새로운 정책을 전개하게 돼요. 긴급조치 9호의 시대가 열리면서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의 대대적인 반공·반북 캠페인이 벌어지는데, 초중고가 그것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10.17 이후에 학교에서 '유신체제는 한국의 실정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구현이다', '유신체제로 민주주의를 토착화하자', '유신체제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한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라고 교육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주위에 총화단결하여 총력안보로 임박한 북괴 남침에 맞서자'며, 그러한 총력안보를 이룩하기 위해 대대적인 반공 캠페인, 반공교육이 펼쳐지게 된 것이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등이 공산화되는 인도차이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던 4월 29일 특별 담화를 발표하죠. 이 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1975년이 북괴가 남침이라고 하는 불장난을 저지르려 하는 가장 위험한 시기다.” 이렇게 주장을 하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그때까지 두 개가 발견된 땅굴을 들었어요. 북괴 남침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느냐, 땅굴로 북한이 과연 남침, 곧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느냐, 이런 건 전혀 그 당시에 문제가 될 수 없었죠. 그리고는 땅굴 완공 시기가 금년(1975년) 여름이라고까지 얘기를 했어요. 이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엉터리 주장인 거죠. 어떻게 상대방이 할 짓을 다 알고 있느냔 말이에요. 그리고 “반국가적 행위를 하거나 국론을 분열시켜 총화에 배치되는 행위 및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행위는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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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4월 29일 동아일보 석간 기사. "북괴남침할 땐 그들의 자멸뿐"이라는 제목 아래 박정희는 남베트남 멸망과 '땅굴 착공이 1975년 10월 이전에 끝나기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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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담화는 남침이 임박해 있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거예요. 대중들은 대통령이 말했으니 다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박정희는 그것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는 거죠. 담화를 더 인용한다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울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걸 아주 강력하게 내세워요. “총화 단결로 총력 안보 투쟁을 전개하자” 는 것이지요. 특별 담화가 나오자마자 총력 안보 궐기대회가 여러 직장들에서 열렸고, 초대형 궐기대회도 열렸어요. 이때 궐기대회가 많이 열린 대학은 휴교 조치를 내렸기 때문에 교직원이 중심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 유명한 긴급 조치 9호가 선포되었어요. 긴급조치 9호는 굉장히 상세한 긴급 조치예요.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시위 같은 것을 보도하는 것, 개인적으로 알리는 것, 남한테 유인물을 주는 것 전부 다 구속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제일 무서운 거라고 볼 수 있는 건데 어느 누구도 유신 체제, 유신헌법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안 것을 얘기를 하지 못하게 돼 있으니까 안 사람은 몇 사람일 거고 얘기는 못하게 돼 있는 거죠. 유언비어를 퍼트려도 다 구속하게 돼 있어요.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걸리게 되어 있는 거예요. 유신 체제 내지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불만을 얘기하거나 하면 다 여기에 걸릴 수 있다니까요. 국민의 눈과 귀, 입을 다 봉쇄하는 무서운 조치에요.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될 때까지 존재했던 긴급조치 9호가 5월 13일 나온 거죠.
그다음에 <사회안전법>, <민방위법> 등 이른바 4대 전시 입법이 국회를 통과했어요. 그러면서 학도호국단이 학교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반상회가 새로 조직됐어요. 이 반상회 역할이 70년대 후반에는 컸어요. 주민들을 묶어내는데 ‘총력 안보, 총화 단결’로 묶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거예요. 이러면서 학교에는 형사들이나 정보 요원들이, 대학 근처에는 특별 기동대가 항상 출동 대비 태세를 하고 있었어요. 전시체제를 조성하면서 학원 병영화에 이어서, 어용신문이 주장한 대로 대대적으로 사회 전체의 병영화라는 게 진행이 됐어요. 다음해 연초에는 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가 나온다고 말을 해 온 나라가 흥분했는데 국민들이 연말이 되도록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지만 한 방울도 안 나왔잖아요, 이것도 1975년 봄부터 준비한 것으로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면서 모든 초·중·고에서 ‘북괴 남침 규탄대회’ 또 ‘북괴 만행 규탄’, ‘땅굴 규탄’ 이런 것이 나오게 됐어요. 핏자국이 선연한 북괴만행 규탄 같은 무서운 포스터들도 복도나 교실 뒤나 학교 주변에 붙었어요. 고위층에서 ‘빨갱이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몽둥이로 빨갱이를 때려 피가 흐르는 포스터도 학교에 막 퍼져나갔어요. 김일성도 혹이 도드라진 흉측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어요. 이런 포스터를 무수히 보면서 어린 학생들이 자라야 했어요. 서울 한복판이나 통영 앞바다 섬마을이나 똑같았어요.
북괴 남침, 땅굴 얘기가 쉬임없이 들려올 때 한국전쟁과 관련지어 북괴 만행 교육도 아주 많았어요. 그런데 2000년 이후에 국가기구에서 제주4.3학살, 보도연맹학살 등 많은 학살 사건이 조사 보고되었는데, 그 보고서에 뭐라고 쓰여 있어요.
1970년대 말에는 <똘이장군 땅굴편>이라는 게 만들어져서 단체관람 등으로 어린 애들이 그렇게 많이 봤어요. 반공운동으로 최고의 만화영화라고 했는데, 어린애들이 공포심도 갖고 그랬어요. 또 196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승복이라는 아이에 관련된 그런 각종 행사도 대대적으로 이뤄졌어요. 이건 유신 후기로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승복 기념관이 생긴 것도 1975년이고 제일 큰 규모로 이승복이가 활용되는 것도 70년대 후반이고, 1980년대까지도 이어져요. 그래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구호가 이때쯤 되면 ‘나는 악마적인 공산당이 싫어요’로 나타나요. 교정 국기 게양대 옆에는 이순신 동상과 이승복 입상이 세워졌죠. 내가 입상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인지 시멘트로 만들었기 때문에요. 시멘트가 뻔히 드러나니까 보기가 흉하더라고요. 교사의 인솔하에 학생들이 이승복 기념관, 반공관에도 많이 가고, 교사들도 선발이 되어 단체로 기념관에서 반공 교육을 받고 그랬다고 해요.
이 무렵 간첩 잡기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어요. ‘이웃도, 친척도, 애인도, 간첩인지 살펴봐라’하는 게 그 당시 구호로 많이 나왔고, 산골일수록 곳곳에 간첩식별 포스터를 붙여놓았지요. 학교에서도 그런 구호를 얘기하면서 ‘간첩 식별법’을 가르친 거예요. 간첩 잡기, 간첩 식별 문제는 반상회에서도 자주 나왔어요. 이웃도 친척도 애인도 간첩인지 살펴보라는 것은 온 국민이 서로 서로를 감시하라는 것이나 다름 없었어요.
문제는 북에서 간첩 효용도가 떨어져서 간첩을 조금 내려보낼 때 이런 간첩잡기운동이 크게 일어났다는 거예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자료를 보면 1950년대에는 1,674명, 1960년대에는 1,686명이었는데, 1970년대는 681명이었어요. 아마도 1970년대 후반기에 훨씬 적었을 거예요.
1975년 후반기에는 중앙정보부가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걸 발표했어요. 조국이 그립고, 조국에서 공부하고 싶고, 조국을 알고 싶다 해서 일본에서 일부러 한국에 와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어느 날 중앙정보부로 끌려갔고 고문을 당한 후에 간첩이 된 거예요.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총화단결-총력안보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겠지만, 그 무렵부터 간첩이 적다보니까 간첩 조작 사건이 꽤 있었어요. 납북어부나 재일교포가 이러한 조작사건의 표적이 되곤 했어요.
1970년대 후반의 반공 교육은 혐오와 증오, 역사 왜곡으로 가득한, 혐오와 증오, 역사 왜곡의 완결편, 결정판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많았지요. 그것은 오로지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유신국가가 기획하고 교육, 문화 당국이 실행했으며, 문학인(소설가, 시인, 동화작가, 유신 후기에만 반공문학상이 있었어요.), 영화인(큼지막한 보상이 따랐어요.), 코미디언 등 방송인이 포함된 일부 민간인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더랬어요. 이러한 교육과 문화는 특히 자라는 어린 학생들한테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었고, 오늘의 혐오와 증오, 역사 왜곡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어요.
북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살 수가 없는, 이리나 승냥이가 우글거리는 그런 곳으로 비춰졌어요. 학생들 글짓기에도 이러한 묘사가 나와요. 그래서 밤에 무서운 악몽 같은 데 시달리게 됐죠. <똘이장군 땅굴편> 같은 영화가 어린애들한테 많은 영향이랄까 충격을 줬다고 그래요. 오성철 교수의 <한국현대교육사>에는 당시 학교에서 반공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구체적인 예로 보여주는 것이 있어요. 그 중 두 가지만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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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 만화영화 <똘이장군 제3땅굴편> ©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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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한 중학교의 <학교 운영 계획>을 보자고요. 1년에 봄, 가을로 두 번 ‘교내 반공 웅변대회’를 열고 6월에는 ‘6.25 당시의 참상 사진 전시회’를 열어요. 또 6월과 10월에는 반공 표어·포스터를 모집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교사 인솔하에 반공 영화를 관람하고 10월에는 반공 교육 자료 전시회를 열게 되어 있어요. 중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반공 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이건 다른 중학교와 경쟁적으로 하는 거겠죠.
또 1978년 한 국민학교를 보죠. 도대체 어떤 교사가 이런 머리를 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운동회를 하는데, 그야말로 반공 운동회에요. 트랙 종목으로 김일성 잡기 달리기, 적진 돌파, 땅굴 폭파, 안보 경기, 백마고지가 있어요. 그 다음에 필드 종목을 보면 간첩 신고, 간첩을 잡자, 간첩은 내가 먼저, 간첩 생포, 간첩색출, 김일성 교수형, 김일성 혹은 내가 뗀다, 이런 것들이에요. 운동회조차 이러니 도대체 이게 교육이냐 하는 거죠. 학교 교육이나 학생들 학내 활동이 반공교육에 예속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참 너무나도 답답하고 무서운 시대였지요. 사실 이때의 반공운동은 전방위적이었어요. 가요라든가 영화라든가 TV라든가 거의 모든 것이 1975년경 안보 또는 유신 체제 옹호를 하도록 그렇게 돼 있었더랬어요.
또 이 시기에 충효 교육이 참 대단했어요. 박근혜 이 사람이 충효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어요. 그때 무슨 큰 단체에서 총재로서 전국 각지를 다니고 그랬어요. 교사들이 충효 교육을 많이 했어요. 이승만 정권 말기 때도 삼강오륜이 ‘오늘 우리의 도덕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세상에, 전근대 중세시기 수직적 상하 인간관계를 중시한 유교 규범을 독재 정치, 일인정치-이승만 정권도 일인 정치에요. 이승만 혼자서 모든 위대한 일을 다 했다는 거에요-에 유리하다고 해서 이승만 정권 때나 박정희 정권 때나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건 시대를 넘어서 있을 수 없는, 너무나 잘못된 교육이에요.
나는 1991년 성균관대학교에 가게 됐는데 그 무렵부터 서울시 교사 연수를 했어요. 여러 해 동안, 그때 강의실에서 빠지지 않고 내가 물어본 게 한 가지 있어요. "10.26 사건 때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린 사람 손 들어봐라", 그러면 여교사들은 거의 전부가 손을 들었어요. 남교사들은 몇 명이 손들기도 하고 그랬어요. 유신시기에 교사들이 ‘박정희가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 국가 안보를 위해서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나중에 부천 성고문 사건에 나오는 권인숙 그분이 적반하장격으로 감옥에 갇히는데 그때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그 안에서 변론서를 써요. 거기에 이렇게 돼 있어요.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유신헌법을 한국의 민주주의의 토착화된 산물이라고 칭찬했었고, 저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친구들과 얘기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죽을 때까지라는 건 80, 90세 되어 가지고 죽을 때를 가리키는 거죠. ‘그러던 제가 반 친구들과 다 같이 대통령 서거 소식에 접해서 마치 부모님 초상이라도 난 듯이 엉엉 통곡을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유신체제는 학생들의 정신을 병들게 해도 보통 심각하게 병들게 한 것이 아닌, 그런 박정희 일인 독재체제였어요.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