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항상 합리적 선택을 할 거라고 기대하지만 … ”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모든 상품의 가격을 설명하려 하지만 …”
언제부턴가 교과서의 경제 단원들을 그대로 가르칠 수 없게 됐다. 합리적 선택, 생산-소비-분배, 수요-공급의 법칙, 국내 총생산, 물가 상승, 국제 무역, 금융자산 관리 등. 경제교과서는 경제학의 넓은 스펙트럼 중 오른쪽 맨 끝에 있는 주류경제학(부르주아 경제학, 속류경제학, 자유시장주의 경제학)의 용어풀이집에 불과했다. 그래서 내 경제수업에선 덧붙이는 말이 많아진다. 경제교과서를 소개하지만, 이어서 그것의 한계, 반례, 반증, 반박한다.(경제교과서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이런 경제 교과서로는 시민이 탄생할 리 없다」, 『오늘의 교육 69호』,에 자세히 다뤘다.)
그중 금융은 주류경제학에서조차도 학문보다 낮은 '설'과 '이론'의 위치이지만, 국가교육과정은 이를 버젓이 교과서에 넣고 학생들로 하여금 ‘안정적인 금융 생활을 위한 자산 및 신용 관리 방안을 계획’하게 하란다. 친구도, 동료도, 대통령도 재테크하라는 세상이라 그런가. ‘선도적인’ 교사들은 이미 바람직한 금융생활 단원을 두고, 금융교실, 모의투자 동아리를 운영하며 성공 모델로 강연을 다닌다. 관련한 연구회, 직무연수, 발표회에 추종하는 교사들이 몰린다.
그런데 나는 금융교실은 도저히 못하겠다. 금융교실은 경제교과서가 가진 한계를 그대로 반복한다. 아니 반복에 그치지 않아서 더 큰 한숨을 쉬게 한다. 모형 위에 모형을 또 얹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경제학이 무리한 가정으로 지어올린 모형 위에, 금융교실엔 교사의 더 작위적 모형이 더해져 경제실험, 학급운영, 게임이나 규칙으로 제시된다. 몇 가지 살펴보자.(인용의 출처들은 이 기사의 전문인 「[현장에서] 금융 교실의 비극-공동체 교실의 희극」, 『진보교육연구소 회보 98호(2026.6.)』에 밝혔다.
금융교실에서 화폐는 교사의 주머니에서 마구 나온다. 마치 부루마블 보드게임에서 세계일주 한 바퀴를 돌았다고 20만 원을 그냥 지급하는 것과 같다. 학생들 손에 쉽게 쥐어지는 화폐는 모든 걸 구매할 수 있는 전능한 요술봉이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환상, ‘화폐 물신주의’를 갖게 한다. 학생들은 그 화폐로 ‘담임선생님의 몸무게 주식 상품’에 투자한다. “우리 담임선생님 제발 살찌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빈다. 여름방학 동안 다이어트로 살을 뺀 선생님의 몸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기업의 주가는 장기간에 걸쳐 생산을 확대해 오면서 가치가 상승한다. 반면에 담임선생님의 몸무게는 80킬로그램, 100킬로그램, 200킬로그램으로 늘 수 없다. 금융상품의 변동성이라는 특징만 따와 모의투자 상황을 만든 한계가 드러난다. 단기간의 변동성만 보고 투자와 회수의 시세 차익을 노리는 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이다. 교실에서 투기를 조장하는 꼴이 된다.
금융교실에는 자기 삶을 땀 흘려 일구어가는 노동자가 없다. 금융투자 동아리원들의 역할극엔 학자, 정부 관료, 전문직, 기업가만 있다. 사장 역할을 맡은 선생님 지시에 따라 공장에서 분업의 효율을 증명하는 충직한 ‘근로자’만 있다. 노동자가 없으니, 월급을 받게 되기까지의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 노동(인)권 보장에 대한 교육도 없다.
금융교실에선 현실의 노동 차별을 역전되기도 한다. 청소부(250미소)의 월급이 은행원(230미소), 통계청장(220미소), 경찰(210미소)보다 높다. 그런데 현실에선 청소노동자 다수가 우리 사회의 하층으로 몰리는 최저임금을 받는다. 한 대학교의 청소 노동자들이 시급 440원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했다가,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시끄럽다고 소송을 당하기 일까지도 겪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금융교실의 청소노동자는 학교가 다른 청소업체를 계약해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버리는 씁쓸한 일을 당한다. 금융교실에서 최고 소득 직업이 가장 먼저 사라지게 될 줄이야! 교과서 속 지식을 실생활에 연결하여 살아 있는 공부가 되려는 의도로, 금융교실에서 임금 체불, 세금 횡령, 근로계약서 독소조항도 당해본다. 자본주의 경제의 냉혹함을 미리 경험해본다.
고소득 청소노동자였다가 이제는 실업자가 된 학생은 과자와 학용품을 떼다가 학급에 팔거나 티볼 강습을 하는 자영업자가 된다. 자영업자 학생은 독점(monopoly) 시장을 만들어,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기사회생한다. 신성한 자유시장 경제질서의 교란을 일으키는 독점이윤을 얻는 승자독식의 방식을 몸으로 익힌다.(사실 이 독점도 이미 큰 자본을 가진 자만이 쓸 수 있는 방식인 건 안 비밀.)
금융교실에서는 학생들의 모든 행위, 모든 관계, 모든 시간이 돈의 논리로만 움직인다. 교실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한 게임의 공간이 된다. 하지만, 학교는 사적 재화가 오가는 시장이 아니다. 학교를 경제 논리로부터, 사유화의 주장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공유지 위에 공공기관인 우리의 학교를 짓고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재다. 공유지가 과도하게 사용되어 황폐화되는 문제인 ‘공유지의 비극’은 학교에서 벌어져선 안 된다. 공동체의 시민을 기르는 곳인 공교육기관인 학교에서 사회교실은 경제교과서의 문제를 극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금융교실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공동체교실을 만들어간다.
공동체교실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가늘 걸 연습한다. 자유(自由)는 스스로(自)에게 이유를 묻는(由) 활동이다. 자유인은 나에게 되묻는 과정을 통해 단단하게 생각을 다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듣고 끄덕이게 되는 말을 한다. 나의 성찰을 거쳐 타인에게도 설득력이 있는 나의 사고, 나의 가치관, 나의 논리이다. 한편 독일어로 자유(frei)는 친구(freund)와 같은 어원이다. 자유는 옆에 친구가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관계의 어휘이고, 자유인은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심리정치」 한병철(문학과지성사, 2015)) 자유인은 스스로에게 그 이유를 계속해서 묻고, 타인들에게도 끄덕이는 생각을 말하고 나누면서 좋은 공동체를 같이 꿈꾸는 사람이다.
학교 화장실 휴지를 다들 막 써서 금방 떨어진 상황. 금융교실은 사적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공용 휴지를 없앤 후 개인 휴지를 가지고 다니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교실은 휴지를 막 쓰는 문제를 공론화한다. 학급회의를 열어 머리를 맞대고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돌아보고, 공용 휴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캠페인을 하거나 안내문을 적어 붙이며, 휴지를 꼭 필요할 때만 쓰는 생활규칙을 함께 정한다.
금융교실에선 각자 독방에 갇혀 고립된 채 선택을 강요받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몰려 서로의 신뢰와 소통 없이 각자가 최악의 결정을 내리겠지만, 우리의 교실에선 열린 공간에 모여 상의해서 공동의 결정을 한다. 어려움을 분담하고, 좀 더 용기를 내줄 수 있는 친구가 앞장서 준다. 다음 학급회의 때 잘 공동의 노력이 잘 실현됐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우리의 교실은 일부 학생들이 좋은 자리의 임대료를 갑자기 인상하여 당황하거나, 임대료 상한제 두는 것을 보고 착한 임대인이라며 칭찬하지 않는다. 우리의 교실은 친구의 자리에 가격표를 붙이지 않는다. 대신에 눈이 안 좋은 친구는 앞자리, 추위를 많이 타는 친구가 찬바람이 덜 가는 자리나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앉고, 휠체어를 타거나 깁스를 한 친구에게 여유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우리의 교실은 숙제를 얼마나 성실히 했는지에 따라 신용등급을 부여받거나, 신용등급에 따라 직업 선택의 자유의 제약받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들 간에 출발선이 같을 수 없다거나 과업을 수행할 할 수 있는 여건이 다른 것을 안다. 우리의 담임선생님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교실이 굉장히 공정한 시스템이며, 똑같은 출발선에서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산이 쌓이는 거라고, 그래서 빈부 격차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공정한 결과”라고 말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빈곤이 단순히 낮은 소득이 아니라 개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을 영위할 기회가 박탈당하는 상태라는 걸 안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그 학생이 경제적 배경으로 주눅 들지 않고 스스로 성찰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시도, 좌절, 고통, 성취의 과정을 같이 밟아보거나,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내면을 잠시라도 돌보는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게 한다.(「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나(돌베개, 2024))
우리는 공동체교실에서 시장거래 관계 너머의, 온전한 타자로 만난다. 더 무너질 학교 공동체도 없다는 조롱을 들어도, 불평등한 경제 구조 앞에서 교육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초라한 것에 불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에서 바로 그 초라한 것을 한다.(「부자 되기를 가르치는 학교」 하금철 외(교육공동체벗, 2023)) 서투르지만 진지하게 타인과 관계 맺기를 하고, 공동체 속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다. 그런 노력들이 자꾸 실패해도 우리는 서로 괜찮다고, 천천히 해도 된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서로에게 말해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기댄다. 공동체교실에선 공유지의 희극이 펼쳐진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