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약속하였다. 선택의 기회가 확장될수록 더욱 멋진 세상이 된다고. 신자유주의는 주장한다. 훌륭한 소비자가 곧 훌륭한 시민이라고. 신자유주의가 보기에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공간은 시장이다. 사회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2009년에 발간된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의 일부분이다.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화와 2022 개정 교육과정의 도입을 앞둔 지금 전국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인용글의 ‘신자유주의’를 ‘고교학점제’로 바꾸어 읽어보면 전국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그리 안녕하지 않을 것 같다.
학생 과목선택권의 현실
사회, 과학, 제2외국어 등은 이미 과목 선택이 시행되고 있었다지만 내년부터는 고1 공통과정을 제외한 모든 과목이 학생들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학생 선택권’이 임금님이고 조상님인 교육 제도인 셈이다. 하지만 학생의 선택권 보장 혹은 확대는 항상 선(善)이며, 이것을 반대하는 의견은 변화하는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고집일까?
새 교육과정 총론에서는 고등학교 교육 목표를 ‘학생의 적성과 소질에 맞게 진로를 개척하며 세계와 소통하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제시하고 있다. 물론 교육과정은 ‘창의성’이라는 핵심어까지 챙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요컨대 교육은 ‘교육기본법’에서도 엿볼 수 있듯 시장의 논리보다 공공성의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무상교육까지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자기 진로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관리해서 대학으로 진학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미 선택과목제가 일반화된 사회과 교사 입장에서 ‘생활과 윤리’과목이 사회탐구 선택자 수 1위를 수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회의적이다. 대다수의 학생이 철학과를 갈 것도 아님에도 소위 ‘생윤’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이 내신 관리라는 이름으로 비교적 평이한 과목을 고를 확률이 높은 것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양하게 종합적으로 뭐든 알아야 가치 있는 것을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능력인 창의성이 나오련만 끝없는 과목 편식 속에 창의성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또 고교학점제는 스스로 관리할 능력이 있는 학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이 스스로 대학진학 포기, 학교에서 공부 안 하기를 선택한다면?
교사들에게도 전쟁터
학생들만 문제가 아니다. 선택 아니 ‘간택’되지 못할 확률이 높은 비인기 과목들의 경우 사활이 걸려 있다. 학교마다 잔인하게 가르칠 만한 과목이 무엇인지, 없어져도 될 과목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것은 교원 수급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결국 “배가 좁으니 네가 내려라”식의 말들이 오가며 학교 공동체, 교사 간의 관계는 더 파편화될 것이다.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일터인 학교가 이제는 교사에게도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사범대학에서 배웠던 교직의 성직관, 전문직관 따위는 흔적도 없게 된다. 제대로 된 고교 교육에 대한 토론과 절차도, 대학입시제도 변화, 사회 변화 주문도 없이 학교의 변화는 소리 없이, 그러나 누군가의 비명과 절규를 먹고 살며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고교 학점제로 무너지는 교육 공공성
나는 ‘중등교육’이란 한 인간이 이 정도는 알아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교육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 교육이 해야 할 일이란 학생들에게 삶의 방향을 잡고 지혜를 터득하도록 돕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법전에 남아 있는 ‘교육 공공성’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교학점제는 여전히 배워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선택권'이라는 미명 아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분명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공적인 가치가 인정된 교과임에도 일생 그 교과를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해 온 그 어떤 선생님의 삶과 함께 무(無)로 만들어버린다. 또 살아남은 자도 상처뿐이다. 올해는 살아남는다 해도 모두가 불안정한 교육 노동자가 되는 체제에서 공익적 가치를 구현하는 교육 전문 노동자를 꿈꿀 수 있을까. 언제 떠날지 모르는 학교와 아이들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학교에, 아이들에게 진심일 수 있을까!
내년으로 다가온 고교학점제,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전국의 고등학교 선생님들, 모두 안녕하신가요?
다시 읽어본다.
“고교학점제는 약속하였다. 선택의 기회가 확장될수록 더욱 멋진 교육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