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동료 교사에게서 전교조 해직교사 백서를 발간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해직 당시의 기억과 그 이후 기억을 되살려 우리의 전교조 해직 상황을 글로, 백서로 남기는 작업에 동참해 달라는 요청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동지들의 노고를 뿌리치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기에 부담스럽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동지들의 귀한 발걸음에 작은 힘이 되고자, 그리고 나의 교직에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교조 해직교사로서 해직의 역사를 간과할 수 없기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하고 이 글을 쓰기로 하였다.
그래, 내 나름 이 시간을 통해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자.
▲ 89년 경희대에서 열린 전교조 탄압저지 결의대회 © 김명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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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과 1988년! 민주화의 물결이 마구 불어 닥친 그해, 교육을 제대로 해보자는 열정으로 뭉친 우리는 거리로 나섰다. 그 소용돌이 속에 나도 동참하여 해직까지 거침없는 질주를 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운동권의 ‘운’자도 몰랐던,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이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자연스럽게 교직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첫 학교에서 5년의 교직 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길, 도전의 길을 가게 하였다. 가보지 않은 고난의 길을 가게 한 나의 첫 교직의 기간!
아이들이 너무 좋았고 교직도 너무 좋았다. 5년을 보내고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서, 삶에 욕심 많은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개인적인 삶을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린 ‘문학의 밤’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아무런 연고 없이 신문 기사를 통해서 알았는지 달리 인연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그때 찾아가게 된 '문학의 밤' 행사가 나에게 새로운 길을 가는 계기가 될 줄이야. ‘문학의 밤’ 행사가 끝나고 소모임을 했는데 그 소모임이 사회과학 도서를 읽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이었다. 그 모임을 참가하게 된 것이 나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 ‘나의 삶도 중요하지만, 사회에 기여하는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교사로서 교육을 민주화하고 사회를 민주화하는 길에서 내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등등…. 그 모임을 통해 나는 교사로서 사회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일조하는 것은 교육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 실천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교사 개인보다 단체가 더 필요하고 우리는 교육을 하는 교육노동자라는 사실과 노동의 중요성과 노동자의 고귀함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육노동자로서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교육민주화에 동참하자는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전교조에 가입하게 되었다. 내 이름 석자를 발기인에 쓰고, 일고의 고민도 하지 않고 가입 의사를 전교조에 알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정부는 신문에 ‘교사가 전교조에 가입하면, 탈퇴하지 않으면 해직시킨다.’고 연신 대서특필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세상의 이슈에서도 맨 앞에 전교조 문제가 있었다. 전교조 가입에 대해, 교사의 노동조합 결성에 대해 불법임을 강조하며 연일 무서운 겁박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가족이 교육청과 학교의 연락으로 나의 전교조 가입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부모님께서는 난리가 났다고 판단하셨다. 그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던 딸이 학교에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지금 생각해도 부모님의 걱정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놀람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지방에서 올라오셔서 “너 죽고 나 죽자.”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칼이 내 목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 칼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유관순 열사가 따로 없었다. 그때는 내가 유관순이었다. 그리고 우리 동지들이 유관순이고 이순신이고 전태일이었다.
▲ 90년 여의도에서 열린 해직교사 원상회복 촉구 집회 © 김명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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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전까지는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평범한 나도 천주교 순교자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처럼, 애국지사가 된 것이다. 아, 사람의 신념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 순간에. 그 신념 때문에 순교도 하고, 자결도 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해직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에 경기도 구리시의 구리여고에 근무했었는데 기억나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장 선생님께서 “나도 젊은 날에는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고 내 나름 활동 아닌 활동도 했었다.”고 하시면서 “힘내라.”라며 약간 고급스러운 고깃집에 데리고 가서 고기를 사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땐 큰 생각 없이 따라가서 얻어먹었다. 물론 그때도 ‘와, 이런 교장 선생님이었다니!’ 하고 놀라긴 했다. 고맙기도 하고 이상해하면서도 얼떨결에 고기를 얻어먹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그분의 큰마음이 느껴져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졌는데 차일피일 세월이 가며 보답을 못하고 이 시간이 되었다. 여태 소식을 모른다. 살아 계신다면 행복하게 잘 사시고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고3 학생들이 그때 그 당시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을 텐데 ‘참교육을 받고 싶습니다.’라는 예쁜 리본을 교복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고, 학생들이 선생님 쫓아내면 안 된다고 소리 지르면서 몰려왔던 기억이 난다. 너무 귀한 리본 선물은 나의 앨범에 잘 간직되어 나에게 그때 그 아이들의 정의에 대한 울부짖음을 기억하게 하곤 한다.
아참! 그리고 또 기억이 나는 것은 교장 선생님께서 8월 31일 자로 떠나는 해직교사들의 이임식을 운동장에서 하게 해서 우리 학교에서 해직된 나를 포함 두 사람이 운동장에서 전체 학생 대상으로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해직교사 말고 다른 이임 교사도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운동장 구령대에서, 전체 학생들 앞에서 “제가 교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노래 하나 부르겠다.”라고 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 노래를 듣고 선생님들께서 가슴이 미어졌다는 이야기를 후에 전해들은 기억이 있다.
아, 슬프면서도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위해, 교육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기쁨에 해직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물론 내가 너무너무 좋아했던 교직을 떠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큰일, 대의를 위해 싸우러 나가는 전사의 마음으로 그것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진 때였다.
그렇게 해직을 당하고, 나는 전교조 경기지부의 사무실이 있는 수원으로 출퇴근하면서 3년 반, 구리지회에서 1년을 근무하고 복직을 했다. 옆으로 눈 한 번 안 돌리고 전교조 사무실에서 4년 반을 근무했다. 전교조 경기지부 사무실이 있는 수원을 오가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경기지부 총무부장과 사무국장을 하면서 다음날 회의 문건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운 적도 몇 번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도 있었다. 사무실이 수원시 팔달구 화서시장 건물에 있었는데 밤에는 아무도 없는 상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잠금장치도 허술한 낡고 컴컴한 곳에서 누구라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나? 그런데 그때야말로 젊었고, 그야말로 전교조에 미쳐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이 없었던 때라 무서운 것 등등은 안중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교조 결성 초창기에는 집회도 엄청 많아서 안 가본 대학이 없을 정도였고, 그것도 경찰이 하도 심하게 구니까 조용히 암호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움직였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서울 중부경찰서로 잡혀 들어갔는데 경찰이 밤새도록 우리에게 조서에 서명하라고 협박했는데 나는 끝까지 서명을 안 하고 나의 자존감을 지켜내 자랑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저녁에 영화에나 나오는 경찰서에서의 식사도 기억이 난다. 그때는 젊어서인지 투쟁 열기로 가득 차서인지, 모든 게 신나 있었다. 보람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랬기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이 아예 안 들었다.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목 놓아 엉엉 울었던 기억도 난다. 집회 때, 우리가 이렇게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데 범죄자 취급받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던 교직마저도 쫓겨나야 하는 현실! 교사도 엄연히 고귀한 노동자인데 대접을 못 받고 여기저기 길거리에서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게 너무 억울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구호를 외칠 때도 울분에 차서 목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터져 나왔다. 그 시절 그렇게 한이 가득 차서 목소리 높여 정권에 분노를 구호로 외쳤던 기억이 난다.
동지들과의 추억도 많이 기억난다. 투쟁 현장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밥해 먹으면서 일했던 기억.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너무나 아쉽게도 그때 그 동지애가 거의 사라졌지만. 희미한 기억으로만 가끔 생각해 보는 동지애.
▲ 민자당 항의 방문 전 결의대회 © 김명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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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되고 교단에서 거의 30년이 지나서 나는 2년 전에 정년퇴직을 했다. 복직 이후 교단에서의 교직 생활은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복직을 안 했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이렇게 좋은 교직을 할 수 없었을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물론 그때 그 당시로 가면 또 그 길을 가겠지만, 교단에서 내 인생을 보낼 수 있었고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예전 같지 않은 태도나 교사의 자부심을 못 느끼는 상황이 발생할 때, 교육의 민주화가 멈춰 있는 느낌이 드는 때는 너무 괴로웠다. 교사들도 예전의 교사들이 아니고 학부모들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 아직도 발휘되는 알량한 관리자들의 권력 남용, 비민주적인 덜 열린 교육 현장 등등. ‘내가 이러려고 해직의 길을 갔었나?’ 하는 자괴감도 컸었다. 해직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밀려드는 허탈감과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단에서의 현실이 덜 이루어졌을 때의 자괴감이 컸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희생한 만큼 교육계는 많이 민주화되어 있고 합리적인 제도, 실질적인 제도도 많이 만들어진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인사위원회, 학교운영위원회, 에듀파인으로의 예산 활용, 나이스에서의 근무상황 신청 등등…. 그래도 우리가 이루어낸 결과는 많다고 본다. 물론 아쉬움도 많다. 1989년 해직에 대한 원상회복도 안 되었고, 해직 기간의 호봉도 전혀 보상이 안 되었고, 달랑 받은 건 ‘민주화운동 관련자 증서’ 하나뿐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우리가 그 큰일을 했다는 것, 분명히 우리나라 교육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사실 그 하나만이라도 내 삶에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평범한 내가 그 큰일에 동참했었다는 사실,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아쉬움은 후배들에게 맡기는 바이다.
자랑스럽게 한 인생 살다 간다. 아직 남은 인생도 멋있게 잘 살고 갔으면 한다. 교사로서의 삶, 후회하지 않는다. 해직교사로서의 삶,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자랑스럽다. 내가,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