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추억(?)하다
예전 학교를 기억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첫 번째는 지금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교사가 교실에서 담배 피우던 시절이 있었다. 교사가 자리에 앉아 담배를 뻐끔거리며 재떨이에 재를 털던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재떨이를 비우는 당번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오래전 일로 느껴진다.
두 번째는 어머님이 상담으로 학교에 오셨는데 담임선생님과 이야기할 때마다 “말 안 들으면 두드려 패서라도 가르쳐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구태여 저렇게 말씀 안 하셔도 될 법한데 꼭 그렇게 말씀하셨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부모는 학교를 절대시하는 측면이 강해서 민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세 번째는 맞았던 기억인데 성적표가 찢어진 채로 학교에 가져가니 담임선생님이 싸대기를 몇 대 때렸다. 코피가 터져 수돗가에서 울며 씻던 아픈 추억이 있다. 당시 한 친구는 담임선생님에게 싸대기를 맞아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잘못했겠거니’하고 생각했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이 아무렇지 않던 시절이었다. 세 가지 추억 모두 지극히 비교육적인 일이었지만 모두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했을 뿐 감히 교사에게 따지거나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학교가 아프다
세월이 흘러 그런 시절을 겪었던 학생들이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많이 변해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몸이든 마음이든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행여 힘들다는 말을 하면 “배가 불렀어. 여름과 겨울에 방학 있겠다, 네 시 반 퇴근하는데 뭐가 힘들어. 그 정도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하고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다.
또 교사 편이 되어주어야 할 교육부는 현장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은커녕 교원평가를 만들어 학부모가 교사를 존중하지 못하는 문화를 부채질하고, 교사의 자존감을 짓밟기에 이르렀다. 이뿐인가? 학교 현장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수많은 비교육적인 일이 벌어졌다. 북유럽을 동경하며 수업을 배우라고 외쳤지만 정작 행정 업무가 전혀 없는 상황은 애써 무시했다.
결국 갈수록 교사의 행정 업무는 늘어갔고, 마음 치유가 필요한 아이들도 늘어만 갔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을 온전히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며 아이 생각을 끌어안고 고민하는 교사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힘들고 서러웠으면 그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을까? 다시 아이들을 이야기하려면 교사 마음을 헤아리며 따스한 위로와 마음 살핌이 절실한 때다.
많은 교사들이 “그래, 일이야 그냥 하면 되니까 참을 수 있어”하고 버텼지만 정당한 생활지도조차 하지 못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현실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교사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우울한 현실은 결국 곪았던 상처가 극단적 의사 표현으로 터져 나왔다. 서이초 선생님뿐만 아니라 여러 선생님의 죽음이 그런 외침이었다.
교육공동체가 살아야 한다
지식 암기와 점수 따기 경쟁교육을 비판하고,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며 아이들이 존중받는 교육을 꿈꾸며 교육 운동을 해오셨던 이오덕 선생님이 지금 상황을 보셨다면 뭐라 말씀하셨을까? 마치 소모품 취급을 받는 교사들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교사 마음은 상처가 쌓이고 쌓인 상태로 너덜너덜하다. 둘레 동료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안쓰러울 만큼 하루하루 버겁게 버티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얼마 전 국회에서 그나마 교권 4법이 통과되었다. 교원이 아동학대로 신고되더라도 정당한 사유 없이 직위해제 처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교장은 교육활동 침해 행위를 축소하거나 은폐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치 작용과 반작용처럼 교사들의 비교육적인 누림(?)은 교사들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다시 그 부메랑은 돌고 돌아서 교권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교사들이 아프고, 힘들지만 아직도 교실에 아픈 아이들이 제법 많다. 아이들과 글을 쓰다 보면 아직도 우리 교사들이 두 눈 부릅뜨고 관심을 주어야 할 아이들이 보인다.
“나는 화가 날 때 갑자기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죽여버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는 죽이는 장면을 생각하며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일까, 어떻게 고통을 줄까 등을 생각한다”
6학년 ○○이는 화가 나면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아이다. 또 교사의 관심을 끌고 싶어 지나친 행동을 하는 아이도 여전히 많다.
▲ 학교 물품을 수리하는 장승초 교장 선생님 © 윤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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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처럼 학부모가 교사를 절대시하는 시절을 바라는 게 아니라 교사를 무시하지 않고, 믿어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입이 닳도록 하는 이야기지만 국회는 법으로 힘을 싣고, 교육부와 교육청은 본질인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행정 업무를 없애야 한다. 더불어 학부모와 교사는 엄혹한 시절이라고 더 두터운 벽을 켜켜이 쌓을 일이 아니라 회복의 만남으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서로 처지를 바꾸어 소통한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학부모는 존중하는 마음으로 적극 교육에 참여하고, 힘든 아이는 처지와 상태에 맞게 개별화, 치료와 상담을 받아야 하며, 교사는 쉼과 존중, 치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있는 사무실 문밖에는 ‘교무업무지원실’ 표찰이 보이고, 여전히 아이들은 “킹콩샘, 간식 주세요”하고 지원실을 들락거린다. 교장실이 따로 없이 내 옆자리에 앉은 교장샘은 월말 방과후 선생님 강사료를 품의하느라 바쁘다. 교감샘도 보강에, 공문 처리로 쉴 틈이 없다. 이렇게 서로 역할을 나누고 살피며 지내다 보면 꿈틀꿈틀 공동체가 살아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