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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의선거 수업을 하고 있는 아이들. © 서재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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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선거 수업을 그래도 하는 게 낫겠지? 아니야, 이번엔 안 하고 싶네, 정말...’
6월 3일은 제9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실제 선거와 연계하여 직접 후보자와 공약을 검토하는 모의선거 수업을 예고했다. 학생들은 선거공보물 우편을 준비물로 챙겨오기로 했다. 그런데 6월이 다가올수록 이 수업이 망설여졌다.
2020년 21대 총선,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2022년 20대 대선과 제8회 지선, 2024년 22대 총선, 2025년 구로구청장 보궐선거와 21대 대선. 우리나라 3대 선거가 있을 때마다 거의 모의선거 수업을 해왔다.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되고, 미래에 유권자로서 투표소에 꼭 가게 될 거다. 투표만이 아니라 정당 활동, 정책 제안, 사회 참여로 이어지게 하는 ‘정치 효능감’을 높일 거다.
정치 기본권이 없는 교사는 뭐든 하지 말라는 식의 선거법으로 인해 ‘유사 모의선거 수업’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와, 이와 연결된 또 다른 문제들도 많다. 그래도 모의선거 수업의 좋은 점들이 아쉬운 점들보다 더 크다고 생각해 왔다.(모의선거 수업의 여러 장면, 그 의의와 한계에 대해서는 「모의 선거 수업으로 채운 것, 채울 수 없는 것」, 『오늘의 교육』 Vol. 68. 196쪽~212쪽에 자세히 다뤘다.)
망설이게 된 요즘의 이유는 경악할 만한 저급한 내용을 공보물에서 더 자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년 4월 구로구청장 보궐선거도 그랬다. 그로부터 몇 달 전 12.3. 내란이 있었고, 극우 세력의 양성화, 제도권화, 정당 정치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드러나는 시기였다. 한 후보는 이주민 혐오를 선거공보물에 버젓이 넣었다. AI 기술을 적용한 방범 카메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공보물에는 ‘불법체류자’라고 적혀 있다.)를 색출하여 추방할 거라 했다. 중국 출신 이주민 밀집지에서 이들을 몰아내자는 의지를 담아, 개봉역을 살수대첩의 장수 이름을 따 을지문덕역으로 개명하자 했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방식 외에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이 전혀 없는 자들이 지껄여대는 ‘개소리(Bullshit)’(「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필로소픽, 2026))를 내 소중한 사회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친히 보여주는 꼴이다. 저런 선거공보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해악이다. 모의선거 수업으로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은커녕, 오히려 정치를 싫어하게 되진 않을까. ‘혐오 정치’를 접하는 학생들이 ‘정치 혐오’를 가지게 되지 않을지 걱정된다.
이번 지방선거에도 아니나 다를까. 혐오 선동의 말이 공보물을 받아보기도 전에 길거리의 현수막에 걸렸다. 이들을 전자칠판에 띄우고 반인권 사례로 다루고 싶지만, 나는 이런 정당한 비판에 대해서도 ‘왜곡된’ 정치적 중립성을 무기로 한 민원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한국의 교사이다. 교사의 정치 기본권이 없다는 이상한 현실을 여기서도 마주하며, 나는 어쩔 수 없이 ‘혐오’ 문제를 소개하는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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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표현과 혐오 정치 PPT 이미지. © 서재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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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큰 사회문제입니다. 혐오는 누구도 해서는 안 되지만,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큰 공직자들은 해서는 안 될 말이죠. 제가 특정 후보자나 공약에 대해 ‘혐오 표현이다. 아니다.’, ‘혐오 정치다. 아니다.’라고 말해드릴 순 없어요. 다만, ‘혐오 표현’과 ‘혐오 정치’의 정의를 보여드리니, 그런 후보나 공약이 있는지 찾아보고 모둠원들과 나눠주세요.”
혐오 표현과 혐오 정치의 의미를 알려준다. 학생들이 꼭 분별해내길, 한심해하고 화가 나길, 황당한 일이라며 모둠원들끼리 시원하게 욕하길, 속으로 빈다. 잠시 뒤, 간절한 소원은 예상보다 아주 원활하게(?) 이뤄졌다. 학생들은 선명하게 혐오를 골라내고 있었다. 혐오 정치의 선동에 학생들은 휘둘리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에 대한 감각은, 때때로 앞의 세대가 자세히 설명하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잘 발휘되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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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이 작성한 수업 활동지. © 서재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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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빨간색 좋아해요? 파란색 좋아해요?”라는 학생의 장난기를 담은 질문. 정치 수업에서도 어떤 정치적 지향이나 지지 정당을 밝힐 수 없는 선생님을 가볍게 놀리는 말을 듣고 머뭇거린다. 속으로는 이렇게 답한다. ‘나 빨강, 파랑 둘 다 안 좋아해.’
색의 뚜렷한 대비와는 대조적으로, 거대 양당 각자가 고유의 정강을 가졌는지 의문이다. 빨강과 파랑을 바꿔서 보여줘도, 서로 뒤바뀌었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 특히 지방선거에선 전철의 신설과 지하화, 공공부지에 상업시설 유치, 재개발과 아파트 대단지 건설 같은 “당신의 집값이 오를거야”라는 욕망을 자극하는 성장·개발 이데올로기 안의 말잔치들이다.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아)과 동지(피아)의 구별’(칼 슈미트, Carl Schmitt)인 건 인정한다. 우리편과 상대편을 가르는 형세가 현실 정치의 민낯이다. 하지만 ‘아(동지)’가 아닌 ‘피아(적)’가 꼭 한 집단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유독 한국에서만 아군과 적군이 빨강과 파랑으로, 단 두 개의 선택지로만 나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자택일의 정치는 한국 선거제의 반민주성에서 비롯된다. 1등이 모든 의사를 잠식해 가져가는 ‘다수대표제(소선거구)’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선거제는 소수 후보와 정당을 향한 의사를 무시한다. 다양한 구성원의 의사를 그대로 의석으로 환산하는 비례대표제(중대선거구)는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에서 일부 적용하고 있으나, 전체 의석의 10%라는 구색 갖추기 수준이다.
민주 정치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정치 선진국들이 다수대표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동형 비례대표제, 순위제, 추첨제 같은 100% 비례대표제를 시도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멀리에 있는 한국의 선거제다. 그나마 일부 들여온 비례대표제는 정당 득표율에 50%만 연동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이며, 이마저도 거대 양당 아래 이합집산하는, 이른바 ‘위성(연합)정당’이라는 기괴한 이벤트 정당도 선거 때마다 생겨난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분법의 정치에서, 빨강이 파랑을, 파랑이 빨강을 제압하면 된다. 구호는 선명하고 단순해지고 상대를 공격하는 말들이 더 거칠어진다. 이때는 파랑이, 저 때는 빨강이 이기는 선거이며, 결국 파랑과 빨강 서로가 이기는 선거이다. 빨강과 파랑이 아닌 색들은 정치적 상대가 아니다. 이분법 밖의 색들은 유효표가 되지 않고, 무시되거나 함부로 대해도 된다. 상대도 되지 않는 색들은 혐오해도 되는 대상이 된다. 이분법의 선거제와 정당 구도의 끝에 혐오 정치가 있다. 혐오 정치는 한국의 낡은 선거제가 낳은 현상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혐오를 선별해 내는 새로운 시대의 눈으로, 한국의 이분법 정치의 폭력성도 똑바로 보면 좋겠다. 빨강 아니면 파랑만 있는 세상은 혐오 정치와 마찬가지로 상식이 아니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노랑, 초록, 보라, 하늘 등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색과 정당과 다양한 주장이 있다고 말하면 좋겠다. 다양한 색이 몫을 얻게 되면 혐오 정치는 자리하지 못할거다. 이런 토대 위에서야 모의선거 수업이 진정으로 정치효능감을 높이는 시간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