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 주 사회수업은 교실 밖에서 한다. 봄나들이를 간다. 자연과 계절은 지식으로 알기도 하지만, 몸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며. ‘알맞은 시절을 사는 기쁨’(「제철 행복」 김신지(인플루엔셜, 2024))도 세상 공부라고, 특히 꽃이 피는 봄날을 친구들과 같이 맞이하는 건 좋은 사회적 삶이라며.
교문을 나서 인근 공원으로 향한다. 출근 시간을 지나 한산해진 거리. 따뜻한 봄햇살을 쬐며 걷기만 해도 학생들의 얼굴은 상기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이따금 근처 공원에 다녀오긴 했을 텐데 중학교의 교과수업에서 이랬던 적은 없었을 거다. 아니, 이 아이들은 그 시기에도 활동적인 상상들이 '방역'의 이름으로 제한되었던 ‘코로나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간이 더 새롭다.
꽃이 피고 나무 그늘진 장소들을 찾아 걷다가 공원에 도착한다. 만개한 벚꽃 아래 모여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공원 한 편의 벤치에 모여 앉는다. 자유시간 전에 꼭 거쳐야 하는 공동 과제가 있다.
“자, 이제부터 ‘멍때리기’를 할 거예요.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도 아니고, 조는 것도 아니에요. 시선을 멍하니 두고, 생각을 비우는 겁니다. 잡념들을 계속 떨쳐내 보세요. 딱 15분. 선생님도 같이합니다. 준비, 시작!”
15년 인생에 가장 긴 15분이다. 잠시도 못 버티고 옆 친구를 툭툭 치고, 손장난 하고, 다리를 떨고,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아이들. 슬며시 다가가 눈치를 주기도 하고, 힘들어도 다시 한번 견뎌 보자고 한다. 어느새 고요해진다. 새의 지저귐과 공사장의 소음, 경적과 정적, 바람 소리가 섞인다. 묘한 고양감을 느낀다.
“너무 길었어요.”, “가만히 있기 힘들었어요.”
끝나는 알람이 울리자, 작은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잘하는 친구도 있고, 힘겨워하는 친구도 있네요. 뇌과학자들도 머리를 비우는 게 뇌 건강에 좋다고 말합니다. 평소에도 해보세요.”
라고 뉴스에서 주워들은 정보를 전달하는 나. 그런데 사실 나부터가 매번 곤혹이다. 승모근이 당기고 왼쪽 눈두덩이가 왠지 모르게 간지럽다. 꼼지락거리게 된다. 머릿속엔 온통 복잡한 생각들로 꽉 찬다. 나는 어쩌다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디는 인간이 됐을까.
멍때리기가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된 건,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사는 누구나의 문제 아닐까. 매 순간 빨리빨리, 일사불란하게, 스치듯 사는 도시의 흐름이 곧 현대인의 하루 아닌가. 심지어 ‘여가’도 느긋함이 없이 급하게 이것저것의 취미를 해치우는 사람들. 스마트기기의 번쩍번쩍하고 자극적인 스펙터클에 눈을 맡긴 사람들.
멍때리기의 얼굴은 내가 4월마다 마주하는 표정과 겹친다.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얼굴은 망자를 떠나보내 한없는 슬픔에 넋이 나간/넋을 놓은 이들의 표정이기도 하다. ‘멍하니’는 애도(哀悼)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멍때리기가 불가능해지는 지금 세상에선 애도마저도 버거운 일이 되어 버린 걸까. 세월호 참사 이후의 12년은 기억과 망각이 대결한 세월이기도 했다. ‘잊으라’의 강요는 극우 세력과 몇몇 권력자의 망언 만이 아니었다.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가 기억과 애도를 못하게 한다.
“세월호 추모는 안 하고, 안전 캠페인만 해도 될까요?”
매년 해오던 ‘세월호 추모제 겸 안전의 날’ 등교맞이 행사를 같이 준비하는 학생회와의 대화. 학생회 임원들의 제안을 듣고는 말문이 막혔다.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만 안전한 사회를 바라는 캠페인을 할 수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이지?!’
그렇지만 학생들은 전혀 악의가 없었다. 정말로 애도의 행위를 모르겠고 막막해서 나온 말 같았다. 2014년 당시엔 4살이었으니 직접 경험도 아니고, 사회적 참사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는 사회를 살아온 탓일까... 학생들의 말을 듣고도 바로 꾸짖지 못했다.
가뜩이나 ‘안전’이란 말과 가치를 오염시킨 관료제에 화가 나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정한 교훈을 국가관료제는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안전이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아니라, ‘안전사고 시 책임소재를 문서로 떠넘기면서’ 쌓이고 있다. 관료제의 불안을 때우는 마음의 안정(안전)을 위해서 단위학교는 매년 30쪽이 넘는 무결점의 안전계획을 작성하여 학교운영위원회를 통과시킨다. 이 문서는 앞으로 얼마나 더 부풀어 오를까. 50쪽 100쪽이 되면 학교는 안전한 곳이 될까. 학교 밖에 잠깐 바람 쐬고 오는 게 뭐 유별난 일인가 하지만, 이 봄나들이도 안전계획을 세워 내부결제를 ‘득’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 폭력이었다. 반대로 ‘가만히 있어 보기’는 깊은 애도로 가는 입구가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공공의 ‘애도 일기’(「애도 일기」(롤랑 바르트(걷는나무, 2018)))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한없는 애도가 계속되어야 사회와 구조를 바뀔 거다. 봄바람을 쐬고 오고도 마음이 가뿐하지 않다. 교무실 서랍에 넣어둔 노란 팔찌를 다시 꺼내어 낀다.
|
▲ 멍때리는 아이들의 뒷모습. © 서재민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