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꿈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는 실력을 보고 미술반원을 뽑았는데 나도 뽑혔다. 여름 방학 때 데생부터 기초를 아주 빡세게 배우는데 나는 집안사정으로 출석하지 않아 방학 마치고 오니 다른 친구들과 너무 차이가 났다. 나는 자존심이 상해 미술반을 나와 버렸다.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바꾸는 첫 경험이었다.
그림 여행의 꿈
어쩌다 보니 도덕교사가 되었다. 어느 학교에 가든지 미술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며 같이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하지만 전교조 활동을 하고 지부장도 되어, 바쁜 삶을 살면서 몇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그림은 내게 사치였다. 잠시 짬이 나면 전시회에 가서 남의 그림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나마 얼마나 위로였던가?
제일 자주 갔던 곳이 덕수궁 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이었다. 서울시청 앞에서 집회가 있으면시작 전이나 끝이 난 후 곧장 미술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또 하나 키운 꿈이 그림여행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상설전시하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도 좋지만 그가 여행을 다니며 그린 이국적 분위기의 그림들이 마음에 꽂혔다. 훌쩍 떠나 어디에선가 주저앉아 그림 그리는 상상을 얼마나 하였던지.
▲ 몽골 알타이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모습 ©조영옥 선생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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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은 해직 10년 뒤 복직을 하고, 내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서야 가능했다. 방학 때만 되면 보름쯤 여행을 갔고 퇴직 이후에는 더 긴 여행도 가능했다. 여럿이 가든 혼자 가든 틈을 내어 그림을 그렸다. 몽골, 쿠바, 베트남, 라오스, 러시아, 일본, 인도 등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우리나라 어디라도 가면 마음에 담아둔 곳을 그렸다. 다섯 번째 몽골여행에서는 보름 동안 그린 그림을 마지막 숙박지 식당에서 전시회까지 열었다. 그런 결실의 하나로 정년퇴임하는 날, 글과 그림을 책으로 엮어 찾아온 분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고 원화 전시회도 같이 했다.
도덕교사에서 그림선생으로
2016년 퇴직을 하고서도 여전히 바쁘게 돌아다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상황에서 길에서 얻는 자투리 시간에 그림을 그렸고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들이 의미를 가져 거의 매일 일기처럼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페이스북에 공유하였다.
내가 활동하던 환경운동연합에서 나에게 생태드로잉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있어 회원들과 함께 눈에 보이는 풀이나 곤충 등을 그렸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변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 육아와 직장생활 등으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던 여성들과 함께 하는 그림교실은 가르치는 기쁨을 준다. ©조영옥 선생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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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진로지도 시간에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은 삶의 세월이 흘러 그림에 대한 동경이 강한 여성들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육아와 직장생활 등으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릴 기회를 갖지 못했거나 나에게는 능력이 없다며 동경만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펜드로잉은 몇 시간만 노력하면 기본적인 것을 그릴 수 있고 짧은 시간에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실제 그림을 몇 시간 배우면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것도 제법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뛸 듯이 기뻐하는 주부들이 많았다. 때로는 자녀들이 인정을 하여 더욱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제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있다. 퇴직을 하고도 내가 여전히 선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른다. 3년 전에는 40년 전 나에게 윤리를 배운 제자들을 만나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다. ‘윤리 대신 그림’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 그림이나 그림 엽서 판매 대금을 4.16 기억저장소 등에 보냈다. © 조영옥 선생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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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상주, 창원, 대구, 왜관, 순천 등지의 친지들이 요청하여 그림 전시회를 하였는데 그림을 팔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때는 4.16 기억저장소나 미얀마, 우크라이나 등에 그림값으로 받은 돈을 보냈다. 가격은 거의 노동가치 수준으로 매긴다.
좋아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여전히 교사로 살아가는 행복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다. 포기했던 그림에 대한 꿈을 이렇게라도 이루고 살아가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