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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6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 받은 손호만 교사
억울한 누명 벗고 사과까지 받은 그가 서글픈 이유
 
김상정   기사입력  2019/10/04 [16:51]

77년도에 대학생이 되어 805월을 온몸으로 겪은 20대 청년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더군다나 그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던 이였다면? 학생운동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강제징집되어 이제 막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25살 청년에게 한국의 839월은 비참하리만치 잔인했다. 국가폭력은 20대 청년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사건과  25살 청년

 

83, 그해 922일 오후 936분쯤,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미 문화원 정문 앞에 놓인 가방에서 폭발물이 터졌고 이로 인해 고교생 1명이 숨지고 행인과 경찰 등 4명이 다친 사건이다. 당시 언론은 1980129일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 1982318일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어 이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혐의자로 지목될 그는 정작 강원도 원주에 부모와 함께 생활했던 터라 당시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했다. 당시는 뉴스를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때가 아니기도 했다. 

 

▲ 10월 2일, 전교조 사무실에서 만난 손호만 교사.     ⓒ 김상정

 

그는 경북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서 제적당한 학생이었다.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이미 친구 집 앞에 매복해 있던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당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관계당국은 합동정보신문조를 구성하고 12개월 동안 무려 749777명을 용의선상에 올리는 등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대구 지역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과 파출소에는 이미 잡혀 온 이들로 꽉 찼다. 그는 당시 북부경찰서로 끌려갔다가 부근 안가에서 고문을 당했다. 발가벗겨진 채로 잠을 재우지 않았고 계속 구타했다. 관절을 뽑기도 했고 매번 강제로 진술서를 쓰게 했다. 대구시경찰청 산하에 대공분실이 있었다. 경찰들 말로는 간첩 잡는 곳이라고 했다. 거기서 본격적인 수사를 받게 된다. 경찰서 차원의 조사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대공 전문가인 수사관들이 왔다. 고문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도 그때 서울치안본부에서 내려와 직접 고문수사를 했다.

 

한달 간의 고문, 지금도 고문했던 이의 이름은 모른다.

 

그 때는 사건을 지휘하고 고문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라고만 이야기를 나눴다. 이 사건 용의자 중 2명이 직접 고문을 당했다고 얘기했던 사람이 이후에야 고 김근태씨를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근안이 그를 직접 고문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대구 지역 대공분실 등 한달여 기간동안 그를 고문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당시 고문했던 자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은 알 길이 없다. 그를 포함해 고문당했던 5명은 하나의 사건으로 조작되고 엮어졌다. 대대적인 언론 공작도 펼쳐졌다. 불법 구금을 당하고 강제고문 수사를 받은 이후, 한 달 정도 지나서야 영장이 발급됐다. 당시에는 고문당한 기간도 정확히 몰랐다.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잠도 못자고 고문을 당하고 있어서 날짜 가는 것조차 몰랐다. 그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정신 차리기를 반복했던 때였다.

 

그렇게 대구 미 문화원 사건 혐의로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면서 폭발물 그림까지 손으로 그리고 만들었는데 정작 검찰이 기소한 내용에는 다 빠져 있었다. 최종 기소 단계에서 박종덕 씨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고 나머지 4명은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박종덕 외 4인의 사회주의 사건'으로 보도했고, 민주화운동진영에서는 '대구 미 문화원 폭파를 빌미로 한 고문조작사건'이라고 불렀다. 

 

1984년 재판부는 관련자 5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에게는 16개월 실형이 떨어졌다. 1심 재판 결과다. 항소를 포기했다. 항소를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다. 당시는 이 정도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밀실로 감금당한 채 진행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에 비하면 감방 생활은 편했다. 억울해 미치겠다는 생각보다는 형을 다 살고 나가서 또다시 강압적인 수사가 들어왔을 때, 민주화운동조직이 무너지지 않고 견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온통 머릿 속을 가득 메웠다.

 

세 번의 제적노동운동가의 길로

 

그는 학생운동을 일찍 시작했다. 2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 사건으로 인해 13개월 동안 제적된 상태로 수배생활을 했고 80년도 어느 날 박정희가 갑자기 죽으면서 복적이 되었다. 복적을 한 그해 5월 광주에서는 공수부대 진압이 들어갔고 대구에서도 민주화운동세력들을 다 잡아들였다. 그는 당시 군부대 군법회의에 회부되면서 두 번째 제적을 당했다. 광주에서 살인적 진압이 있었다는 것도 교도소 안에서 뒤늦게 소리 소문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다 군사재판을 받던 도중, 전방으로 강제 징집됐다. 당시 논산훈련소에 그처럼 끌려온 대학생들이 76명이었다. 특수학적변동자라고 해서 빨간 도장이 찍힌 사람들은 군 보안대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거기서도 많이 맞았다. 어떤 이들은 프락치 공작망에 걸려들었고, 이후 군대 내에서 의문사한 사건도 발생했다.

 

▲ 84년 9월에 대공분실에 끌려가 처참한 고문을 당했던 손호만 교사가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재판장에서 그랬듯이 당시를 증언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세상과 맞서 싸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 김상정


3년간 군대 생활을 마치고 8355일 제대했다. 제적된 신분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건설 일을 시작했다. 집 짓는데 필요한 철근공 기술을 배워서 석달 동안 건설노동자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경,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이들에게 다시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지도 못한 채 대구미문화원 사건 혐의 관련으로 잡혀가서 고문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844월 레이건 미 대통령 방한에 맞춰서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되고 그 때 감옥에서 풀려 나와 복학을 했다. 그런데 졸업은 못하고 다시 제적 됐다. 세 번째 제적이다.

 

세 번째 제적은 자발적 제적이었다. 더 이상 대학에 다닐 필요성을 못 느꼈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87년을 비롯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시 복적해도 된다고 했으나 스스로 거부했다. 노동현장에서 계속 노동운동을 했다. 당시 건설일용노조를 함께 만들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IMF가 터지고 노동현장이 모두 멈췄다. 모두 실업자가 됐다.

 

건설노동자에서 교육노동자로

 

노동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때 대학에 가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2000년도 과거시국사건관련자들의 복학이 가능했다. 3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를 했다. 20003월에 복학을 하고 20018월에 졸업했다. 77년도에 입학했으니 24년 만에 졸업을 한 것이다. 옛 국립사대 출신은 70년대 법 적용이 가능하여 자동발령이 날 수 있다 했다. 그러나 다시 건설노동 현장으로 가야 할지갈등이 심했다. 당시 교사 초년생은 백만 원 정도 임금이었고 노련한 건설노동자였던 나는 2백만 원 넘는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가족들의 권유로 교사의 길을 선택했고 지금은 교직 경력 17년 된 교육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84년 9월을 다시 돌아보다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사건 관련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북한 간첩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일방적인 안기부의 발표였다. 당시 839월에는 이 사건 말고도 다른 사건으로 잡혀가서 국가보안법 등의 죄로 엮여 수감된 사람들이 많았다. 사건으로 엮이지는 않았지만 불법으로 감금당하고 고문당한 후 훈방당한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그때 대구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이 뿌리째 뽑히는 타격을 받았다. 야학에서 공부하는 노동자들도 끌려갔고 심지어 야당정치인들도 국가보안법으로 엮여서 감옥에 간 사례도 많았다.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한 트라우마로 내내 삶이 위태로웠다. 

 

국가폭력에 의해서 무참하게 한 사람의 인권이 유린당한 사건이었다. 친구 하나는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평생을 가위 눌리면서 살았고 그 뒤에 민주화운동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국내에서는 취직이 안 되어 고기잡이 배를 탔던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병환으로 힘겨웠던 삶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국가 권력에 의해서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무참하게 파괴되는 이런 끔찍한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재발방지 대책이 있어야 한다.

 

 국가가 사과를 했던 순간, 그는 귀를 의심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났다. 군부독재타도를 외쳤던 25살 청년은 어느덧 환갑을 지나고 정년을 바라보고 있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36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201910,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하면서 사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후 신문 기사를 통해 나온 것을 보면서 진짜 사과한 게 맞구나하고 생각했다. 2016년 재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문조작사건을 분명히 인정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사과여서 더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을 국가가 자행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서글프다

 

여전히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이 현실이 참담하다. 36년 전, 학생운동을 했던 내가 겪었던 현실과 지금 우리가 부딪히는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이 현실은 다르지 않다. 헌법적으로 보장된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전교조 법외노조, 교사들의 노동기본권, 특수고용노동자나 여타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으로 바로 해고되어버리는 게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 36년 전, 자신을 포함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수많은 이들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여전히 진행 중인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 투쟁에 함께 하고 있는 손호만 교사.     ⓒ 김상정


민주화운동의 큰 축이었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교사가 되어 뛰어든 교육민주화 운동까지 하면 40년이 넘는 삶이었다. 평생을 나름대로 새로운 좋은 사회를 위해서 싸워왔는데도 여전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그리고 같이 끌려갔다가 재심 청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재심이 시작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연락을 해왔다. “나도 그랬다. 나도 겪었다.” 그들에게 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는 이번 재심 무죄 판결을 계기로 당시 고문당하고 피해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재심이 이뤄지길 바란다.

 

억울하게 국가권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다시 국가권력과 싸운다는 게 어쩌면 목숨과도 바꿔야 한다는 용기기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두려움에 머물러 머뭇거린다. 과거의 억울함이 있어도 국가권력을 상대로 싸우는 과정이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익숙하게 알고 있어서다. 어떻게 재심을 결심했을까?

 

노무현 정권 말기에 2010년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이 사건이 조사대상이 됐다. 여기에서 사건을 억울하게 고문조작 된 반인권 사건으로 판단하고 진실규명과 재심을 권고했다. 그마저 없었으면 엄두가 났을까?’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에 따라 2013년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20163월 재심 개시를 확정했다.

 

우리가 고문당하고 강제연행 당하고 불법적으로 밀실에 감금당하고 했던 이 사실이 거짓이 아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만 재판이 진행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길 수 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억울함도 풀려 질 수가 있다면 힘들더라도 이 길을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이나 그런 자기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국가폭력에 의해서 무참하게 짓밟히는 일들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힘들더라도 이것은 가야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사법부가 국가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겠냐는 회의도 있었다. 우리의 정당함을 입증할 자료들은 차고도 넘치는데 내가 직접 당했는데도 나름의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판결을 내려왔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텨왔다. 끔찍한 순간을 다시 떠올려야 했다. 많이 힘들었다. 나이 60이 다 돼서 법정에서 그 순간을 진술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너무 힘들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진술 장면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고문받았던 당시 상황을 드러낼 때 견딜 수 없었던 고문 앞에서 쓰려지면서 사실과 다른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비굴한 상황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었다. 부끄럽고, 한 인간이 고문실에서 무너졌지만 그래도 이것을 드러내야 했다. 참담했지만 버텨야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오늘, 지금 우리는

 

대구지법 2형사단독부(부장판사 이지민)2019101일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그를 포함한 피고인 5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들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면소처분을 했다. 재판부는 무죄 선고 이유로 고문에 의한 자백 진술서 등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국가권력은 36년간의 고통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 드러내기를 마치고 손호만 교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사과를 받아내는 일은 그에게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전교조 법외노조 상태에서 해직당한 그는 다시 이렇게 웃을 날을 바라며 청와대 앞 농성장에 선다.    ⓒ 김상정

 

재심에서 억울한 누명을 벗은 그는 다음 날인 201910월 2일 오후 5,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에 자리한 더불어민주당사 앞을 찾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를 촉구했다. 무려 6년이다. 6년간 그는 법외노조가 된 전교조에서 전교조 대구지부장을 지냈고 그로 인해 2016년 해직교사가 됐다. 지금은 법외노조로 인해 해직된 34명의 교육노동자를 포함한 해직교사들로 꾸려진 전교조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원복투) 위원장을 맡고 있다전교조 법외노조 직권취소와 해고자 원직복직 즉각 이행, 교원·공무원 노동3권 보장이 그가 현재 국가권력을 향해 외치고 있는 구호다.

 

여전히 겨울, 그래도 봄은 온다.

 

  1978년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을 하는 그를 제적했고 2016년 박근혜 정권은 교육노동운동을 하는 그를 해고했다. 201310월 24일 박근혜 정권이 전교조에 노조아님을 통보한 이후의 조치다. 36년전 누명을 씌웠던 국가권력은 다시 또 그에게 해고의 칼날을 내리쳤다. 그는 박정희 정권과 맞선 것처럼 박근혜 정권에 맞서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렇게 독재정권이 가고 세상에 봄이 올 거라 여겼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법외노조가 된 전교조에게는, 해고자가 된 손호만 교사에게는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겨울이다.

 

  36년 전 25살이었던 그 청년에게 또 다시 봄이 올까? 그에게 사과를 했다던 국가권력은 그를 다시 복학시켰던 그 옛날 민주정권처럼 그를 다시 복직시킬까? 사과를 한 국가권력과 그를 교단에서 내쫒은 국가권력은 다른 건가? 달라야 한다는 게 촛불을 든 이유였다. 이것이 그가 법정에서 재판관으로부터 사과의 말을 들으면서도 서글펐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그에게 '봄'은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해야, 해고된 교사들이 복직해야 비로소 이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기도 했으나 세상의 봄은 언제나 왔었다. 그가 만나는 오늘은 늘 세상의 봄을 앞당기기 위해 한걸음 내딛었던 날들이었다. 늘 그의 발걸음이 힘찬 이유가 여기 있었다. 지금까지 교육노동자 손호만 교사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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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4 [16:51]  최종편집: ⓒ 교육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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