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989년 전교조 결성 1호 해직자 신맹순 교사

김상정 | 기사입력 2019/05/0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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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989년 전교조 결성 1호 해직자 신맹순 교사
고물줍는 신노인,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김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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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0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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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줍는 신노인, 3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 전교조 결성 관련 1호 해직교사인 신맹순(78)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하루가 지난 후에야 어렵게 꺼냈다. "30년전으로 돌아간다면전교조를 했겠는가?"라고.     © 김상정 기자

 

"나는 비록 묶여 있지만 아이들을 살리고 민족의 앞날을 활짝 밝혀줄 참교육은 묶여 있지 않다" 전교조 결성 관련 전국에서 처음으로 구속된 신맹순 교사가 1989년 7월 21일 오전 법정에서 모두 진술을 통해 한 말이다. 

89년 7월 22일자 전교조 신문은 당시 상황을 "신 교사를 구속한 낡은 법조문의 위헌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신교사에게 판사도 검사도 말을 잇지 못하고 방청석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전교조 결성 관련 1호 해직자였기에 당시 방송이며 언론에 집중 조명이 됐던 그는 당시 48세였고 고등학생 2명과 중학생 2명의 자녀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은 50만원이었다. 그 해 8월 25일, 그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나왔다.   

 

가난에 내몰리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 임옥순 씨는 적금과 보험을 깨고 세간살이를 모두 팔았고 급기야 이웃에게 아이들 학교 갈 차비를 빌리기도 했다. 빨갱이 전교조 교사라고 연일 방송에 보도되고 손을 여러번 벌리다보니 사이좋았던 이웃과도 멀어졌다. 

 

가난은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위협했다. 어느 날부턴가 아내는 밤늦게 나가서 아침에서야 들어왔다. 신 교사는 아내가 왜 그러나 싶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아내를 기다렸다. 새벽 3시경이 됐는데 어떤 사람이 집 앞에 고물을 가득 싣고 왔다. 아내였다. 아침에 아이들 학교가는 버스비를 줄려면 밤새 모은 고물을 내다 팔아야 한다는 거다. 그 때 신교사는 아내를 붙잡고 울었다. 다음 날부터 신교사는 아내와 함께 고물을 줍는 일을 했다. 그때가 89년 늦여름 8월 20일이다. 그때부터 줄곧 30년간 아내와 함께 고물을 주워서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돌아가지 못한 교단

89년 해직 이후, 그는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94년도에 교단에 돌아가서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시의원에 나가달라는 시민단체활동가들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어. 내가 교단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지났다며 받아주질 않았어." 인천지역에서 신맹순 이름 석자는 '운동권 재야정치인'으로 더 유명하다. 굵직굵직한 선거에서 기존 정치세력에게 도전장을 냈고 실제로 인천시의회 의원도 했다. 당시 시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고, 해직 이후 지역 시민운동을 주도해왔던 경력이 살림살이에 도움될 일은 아니었다.

 

뭐하러 전교조 해가지고 

지난달 26일, 인천 동암역 인근에서 만난 신 교사(78세)는 자신을 '고물줍는 신노인'이라고 소개했다. 그와 집주변에는 낡은 고물들이 가득 쌓여있다. 가끔은 "전교조 안했더라면"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을텐데라는 생각도 든다. 지난 해 1월, 큰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내내 가난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마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물을 분류하고 있으면 사정을 잘 아는 이웃들이 "뭐하러 전교조 해가지고 사서 고생하느냐"라고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던진다. 평생 불평 한마디 없었던 아내 임옥순 씨(74세)도 요즘은 "뭐하러 전교조 해서 온 가족을 고생하게 하느냐"하며 한마디 한다. 어느덧 78세 노인이 된 신맹순 교사의 머리맡에 늘어나는 것은 약봉지 개수다. "저는 요즘 거의 삶 자체를 포기하다시피 했어요."라는 그는 "그러나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아마 다시 전교조에 가입을 할 거고 성격상 좀 과격하게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최소한 원상회복은 되어야

요즘은 고물가격이 떨어지면서 벌이는 시원찮아지고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신 교사는 걸을 수 있고 힘이 닿는 한, 계속 고물을 주으러 다닐거다. 고물을 줍는 일은 환경도 지키고, 자본도 안들고, 밥 맛도 좋고 잠도 잘 온다. 고물을 직접 가져다 주는 이웃도 많고 소개해주는 이웃도 많다. 2003년 신 교사가 수레를 끌다가 길에서 쓰러졌을 때도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그는 새삼 친일집안의 자손은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을 꺼냈다. 민주화운동을 한 이들과 그 가족들의 삶도 마찬가지여서다. 

 

"국가가 이들을 외면한다면 외세가 쳐들어오면 누가 독립운동을 하고, 다시 독재자가 나타난다면 누가 민주화운동을 하겠는가?" 요즘 들어 부쩍 야위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신 교사는 국가가 가족의 아픔을 쓰다듬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최소한 원상회복과 함께 그 사람이 받았어야 하는데 못받은 건 국가가 보상을 해줘야 하고 나아가 정치적 배상을 해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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