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숙려제'를 숙려한다

이현·전교조 참교육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18/09/1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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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숙려제'를 숙려한다
교육부 공론화, 부적절한 의제·졸속 과정
이현·전교조 참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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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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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공론화, 부적절한 의제·졸속 과정

 

문재인 정부 들어 공론화(정책숙려제)가 유행이다. 특히 교육부는 공론화를 가장 즐겨 사용하는 정부 부서가 되었다. 학생부, 대입제도 공론화에 이어 유치원 영어방과후, 학교폭력법 개정까지 공론화를 활용하겠다고 한다. 가히 공론화 만능주의라 할 만하다.
 

근대사회에서는 국회나 지방의회 등 대의기구와 권한을 위임받은 관료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하였다. 일상적인 의견 수렴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법률이나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사결정이 사회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피하기 힘들었다. 이런 정당성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민간 거버넌스였다. 하지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민간단체(NGO)나 전문가들이 시민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지. 혹여 관과 친화적인 단체나 인물들이 관의 들러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정책숙려를 통한 공론화는 시민 대표성을 강화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방안이다. 공론화 과정은 일반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시민참여단을 선정하고, 학습과 토론 등 숙의(또는 숙려) 과정을 거치고, 시민참여단의 최종 의견을 조사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네 단계로 구성된다. 문재인 정부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 여부에 대한 공론화 과정을 통해, 오랫동안 사회적 논란이 되어 왔던 핵발전 문제를 커다란 정치적 부담 없이 돌파할 수 있게 되었다. 원전 건설 중단 공약을 폐기한 찜찜한 결론이었지만, 일반 시민이 숙의를 통해 결정하였다는 명분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교육문제에 대한 공론화가 진행되면서, 공론화의 문제점들이 명료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공론화 과정에서는 의제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 의제에 따라 공론화는 민주적 과정일 수도, 말 그대로 공론화(空論化)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학생부' 공론화는 매우 부적절한 의제였다. 학생부에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만큼 기록할 것인가는 매우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사안으로 일반 시민들이 판단할 수도, 판단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대입제도는 교육의 핵심적인 문제이고, 대다수 사회구성원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공론화에 적합한 의제일까? 대입제도는 거의 모든 교육 사안과 연계되어있는 복합적인 문제이다. 학교에서의 교수-학습-평가, 교육과정과 학사 운영, 고교 입시 및 고교 체제, 지역 및 계층에 대한 유불리, 사교육 시장에 대한 영향 등 여러 영역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대입제도의 세부적인 방안을 설계하는 것은 많은 현장경험과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입 공론화 의제는 세부적인 방안보다는 한국교육의 핵심 문제에 대한 진단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입제도 개편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정도로 제한되어야 했다. 만약 세부적인 방안까지 결정하려면 훨씬 길고 치밀한 숙려 과정(학습+토론)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대입 공론화는 부적절한 의제 설정과 졸속적인 숙려 과정이 결합된 실패작이다. 교육부가 공론화를 도입한 이유는 명확하다. 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참여를 확대하고, 교육문제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관심을 높여 교육개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민감한 사안에 대한 책임회피가 진정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공론화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2003~4년 1년여 동안 학교의 사명, 학생의 학습 지원, 교육행정체제 개선을 주제로 13,000여 회의 토론회에 백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핀란드는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마다 현장 교사들과 수천 회의 토론을 진행하고 학생, 학부모, 사회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를 치밀하게 진행한다. 이를 통해 교육 의제에 대한 교육 주체와 국민의 관심을 고양하고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낸다.
 

대의제와 관료제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직접-참여-숙의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필요하고, 정책숙려제는 이를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부적절한 의제와 졸속적인 과정이 결합된 현재의 교육부의 공론화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국가교육회의가 중장기적인 한국교육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비전특위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쓸데없이 유치원 영어방과후나 학교폭력법 개정 공론화에 힘을 낭비하지 말고, 광범위한 사회적 대토론을 거쳐 한국교육의 전망을 만들어 나가는 데 공론화 과정을 활용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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