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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칼럼] 눈 뜬 ‘정의의 여신’
 
송원재 기사입력  2018/06/07 [18:14]

 

송원재·전교조 서울지부 교권상담실장

 

유럽의 법원이나 관공서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디케(Dike)의 상이다. 그런데 정의의 여신은 헝겊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천칭을 다른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들었다. 눈을 가린 헝겊은 정실과 주관에 좌우되지 않는 공정성을, 천칭은 한 쪽으로 기울지 않는 형평성을 뜻한다. 법전은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법정의를, 칼은 범법자에 대한 심판을 뜻한다. 그래서 정의의 여신은 법과 정의를 지키는 수호자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청사 중앙현관에도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천칭과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은 같은데, 유럽과는 달리 눈을 뜨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그 이유를 재판받는 이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 공정하게 재판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법전을 펼쳐 정확한 판결을 내리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재판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살피고, 저울에 뇌물을 달아 금액을 장부책에 기록하려는 것이라고 비아냥댄다.

지난 525일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동안 풍문으로 돌던 대법원과 청와대의 재판 뒷거래가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의 효력을 다투는 집행정지 가처분 재판에서, 대법원이 박근혜 청와대와 교감을 나누며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설치와 맞바꾸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전교조 등 시민사회단체는 법정의 문은 사법농단이 지배하는 암흑의 문이라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수사를 요구했다.

 

법원이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조사보고서에서 드러난 법원의 민낯은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돈 놓고 돈 먹는야바위 놀음, 시정잡배의 추잡한 뒷거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법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대법원이 민감한 정치적 사건의 목록을 추리고, 청와대의 눈 밖에 나는 돌출판결을 내리지 않도록 스스로 단속에 나섰다. 법원이 전교조 법외노조화 같은 민감한 사건에 대해 판결을 할 때마다, 세계 보편의 기준에서 벗어나 들쭉날쭉 널뛰기를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이요 삼권분립과 사법 정의의 기본 전제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몇 사람의 자리보전과 알량한 숙원사업 몇 개와 맞바꾸려 했다니, 치졸하고 비루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러고도 입버릇처럼 삼권분립과 사법 정의를 되뇌었으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대법원이 법의 이름으로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정당화해 준 꼴이니, 대법원이 사법 농단 적폐의 몸통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대법원을 이대로 두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삼권분립의 세 다리 중 하나가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 사법부는 사법정의 실현은 고사하고 자신의 존립 근거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사법 농단 세력을 몰아내고 정의와 상식에 기초한 새로운 사법부를 세워야 하는 이유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즉각 구속하고 사법 농단에 적극 가담한 법관들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사법부를 바로세우고 법치질서를 확립하는 길이다. 또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원천 봉쇄당한 전교조의 법적 지위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노조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해직의 길을 선택한 교사들도 학교로 돌려보내야 한다.

 

대법원에 묻고 싶다. 당신들이 가리개를 풀어버린 여신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들이 여신이 손에 쥐어준 것은 법전인가 장부책인가? 판사는 판결로 말하는 법, 이제 대법원이 판결로 말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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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07 [18:14]  최종편집: ⓒ 교육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