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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봄은 오고, 또 꽃은 피고
푸사리의 풍모로, 크고 순정한 소의 눈으로 말없이 바라본다
 
윤지형 · 부산 해강고 기사입력  2018/05/29 [00:50]

 

▲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열린 전교조 창립대회 모습.    

 

지난 3월 31일 토요일 이른 아침 나는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윤영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라고 내가 말하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잠깐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는 진작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말이다. 2005년하고도 4월 1일 새벽 그는 홀연 타계했다. 1935년생이니까 요즘으로 치면 아직 한창이라고 해도 좋을 일흔의 나이였다. 그러니까 내가 광주로 간 날은 '윤영규 선생님 13주기 추모식'의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그날 나는 선생님을 만나러 간 거라고, 그는 죽었지만 오늘도 엄연히 살아있다고. 사람은 죽으면 그냥 사라지고 마는가? 누군가는. 그리고 그걸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때로 사실과 진실의 사이엔 깊은 크레바스가 놓여있음을 우리는 안다. 몸뚱어리가 피둥피둥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내게, 그리고 그를 알고 있는 수많은 교사와 사람들에게 윤영규는 그런 드문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날 망월동 5.18국립묘지에서의 추모식 때 윤영규 선생님의 부인, 이귀임 사모님은 "꽃구경, 꽃구경 하시더니 정말 꽃피는 봄날에 가셨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칠 공주(!) 중 막내 따님은 "아빠가 떠나시던 날도 이렇게 꽃피는 봄날이었습니다. 이젠 웃으며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도 말했지만, 지아비 윤영규, 아빠 윤영규, 전교조 30년 역사의 맨 앞자리에 우뚝 선, 거인 윤영규는 죽고 사라져 버린 존재가 아니었음은 추도식 그날, 망월동 국립묘지 곳곳에 피어난 봄꽃들이 여실히 웅변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서울에서, 해남에서, 또 부산에서 정녕 살아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동지'들도 다시 찾아온 봄에 대해, 다시 피어난 봄꽃에 대해 말하고 또 말했던 것은.
 

▲ 추도식에 참석한 조합원들.    
▲ 고 윤영규 위원장 부인, 이귀임 사모님.    


윤영규, 그가 교사·교육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86년의 저 역사적인 '5.10교육민주화선언'과 함께였다. 전두환 정권 치하, YMCA를 우산 삼아 모인 전국의 600여 교사들은 그날을 기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교육현장의 민주화, 자주적 교사 단체 보장' 등을 권력을 향해 요구했다. 1961년 박정희 군부쿠데타 세력이 4.19 혁명기에 건설된 교원노동조합을 무참히 짓밟은 지 25년 만에 처음으로 터져 나온 교사들의 집단적 의사 표시였고 그 선두엔 교사 윤영규가 서 있었다. 어째서 그는 거기에 있게 되었던가? 유년 시절부터 겪어야 했던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거의 초인적인 의지와 집념으로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한 그가 첫 직장인 목포의 한 사립 중학교의 교사가 된 것은 나이 서른이 되던 1964년, 그러나 그는 2년도 채 안 되어 학교에서 쫓겨난다. 학교의 비리와 부정을 그냥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 아니 불의한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한 깨어있는 인간으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때 벌써 예정되었다고 할까?
 
"결혼한 해인 1967년부터 광주상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된 그는 10년째가 되던 1976년 어느 날 중앙정보부 광주 분실로 끌려간다. 때는 유신 독재 치하, 권력은 광주 YMCA에서 청소년 서클을 지도해온 그를 불온 교사로 지목한 것이었다. 그는 심한 고초를 당하고 협박에 불과한 조사를 받고는 풀려난다. 그래도 학교로부터의 파면은 어찌어찌 면해서 재단 산하 여상에 전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1980년 신군부의 '광주 학살' 와중에 그는 또 보안대로 강제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투옥된 뒤 두 번째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럼에도 그는 가만히 엎드려 살 수만은 없었다. 해직 교사 신분으로 광주YMCA중등교사협의회 창립을 주도했고 (……)" ([다시, 닫힌 교문을 열며], 양철북, 2016년, 177쪽)
 
이로부터 한국YMCA중등교사협의회 초대 회장, 전국교사협의회 초대 회장(1987),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위원장(1989)으로의 길은 어찌해 볼 수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수와 같은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해직, 수배, 투옥의 가시밭길이었다.
 

"밥보다 수업이 그립습니다."
1989년 전교조가 태동한 그해 여름날, "바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단식을 했던 그가 편지에 쓴 이 한 마디를 나는 기억한다. 누구보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삶'의 진실, 민주주의, 정의의 역사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며 수업을 하고 싶었던 그임에도 그것을 못하게 만드는 세상과 싸우느라 정작 자신은 교실에서 쫓겨난 시간이 너무도 많았던 가슴 짠한 역설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저 옛날 윤영규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도 하나 떠오른다. 전교조 결성과 함께 파면되기 일여 년 전인 1988년 광주 체육고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전교생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파악했다고 한다. 괄괄한 남학생들에, 사고 치는 녀석들도 많았지만 윤영규 앞에서는 다들 꼼짝을 못했다고 했던가. 그는 저만치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걔가 누군지 알고는 이름을 불렀다 했으니 아이들에게 윤영규는 '나를 잘 알고 있는 선생님, 내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 내게 필요한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영규는 다시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옥에도 갇힌다.
 
"수감 1년 만인 1990년 6월 25일 원주교도소에서 석방된 뒤에도 그의 고난은 끝날 줄을 몰랐다. 1991년 폭력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젊은 대학생들의 잇따른 저항적 분신으로 온 나라가 절망적 슬픔에 신음할 때 권력의 칼끝은 '강경대열사 살인규탄과 공안정국타파를 위한 국민대책위원회'의 상임공동의장인 윤영규를 피해 가지 않았다. 차라리 투옥되었더라면 그는 고단한 육신이나마 잠시 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 그는 1994년 3월에 이루어진 전교조 해직 교사 1차 복직 때는 학교로 돌아가는 대열에도 설 수 없었다. 그에게는 민주주의민족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이라는 과업이 주어져 있었고, 1996년까지는 광주시 교육위원회 교육위원으로 맡은 바 과업도 수행해야 했다. 그가 마침내 광주 충장중학교에 도덕 교사로 복직할 수 있었던 것은 65세 정년을 1년 앞둔 1998년이었다. 전교조가 공식 합법화된 것은 그 이듬해였다." (위의 책, 178쪽)
 
온갖 고초 속에서도 오매불망 조국 해방의 날을 열망타가 운명을 달리 했던 독립지사들처럼 교사 윤영규는 전교조 합법화의 날이 왔을 때는 이미 학교 안의 교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건대, 학교 안의 교사만 교사일까. 인류의 교사도 있고 세상의 교사도 있으며 거리의 교사도 있고 교사의 교사도 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러한 학교 밖 교사, 다시 말해 학교 밖으로의 추방을 기꺼이 감수한 윤영규, 그리고 윤영규의 길을 걷고자 한 숱한 교사들의 헌신과 분투가 있었기에 학교 안 교사들은 힘겨운 속에서도 교사의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 가며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세상 사람들-젊은 교사들도 포함해서-은 찢어지는 가난, 끔찍한 역경, 고문과 투옥의 삶 앞에 서면 막막한 비현실의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윤영규의 그러한 삶을 얘기하고 있는 나도 문득문득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영규가 독실한 기독인으로서 윤영규는 하느님이 부여했다 할 자신의 운명? 그 고난과 영광을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는 사실이다.
 

추도식이 끝난 후 함께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윤영규의 오랜 지인이며 동지들은 살아 생전 그의 별명이 '푸사리'였다고 입을 모았다. 푸사리는 거친 수소, '길들여지지 않는 소'라는 뜻. 과연 몸에 딱 맞는 옷 같은 별명이다.

 

2018년의 이 봄날, 푸사리 윤영규를 생각한다. 그와 함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 서/ 참교육 외치니"를 힘껏 불렀던 때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또한 많은 새로운 과제와 난제들에 직면해 있는 지금의 전교조를 저 푸사리의 풍모로, 또한 크고 순정한 소의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윤영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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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29 [00:50]  최종편집: ⓒ 교육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