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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좌] 베트남 민간인 학살 ... '부끄러운 역사' 마주하기
 
김형배 · 경기 의정부여중 기사입력  2018/04/06 [19:41]

 

주말이면 베트남 중부 다낭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한국 사람이 하루에 5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다녀갔고 양국의 외교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할 것을 다짐하며 지속적인 투자도 약속했다. 정치·외교뿐만 아니라 스포츠, 연예분야에서도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잊지 말아야 하고, 해결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 청소년 평화기행단과 피해지역 현지 아이들이 생존 피해자 집을 방문해 간담회를 가졌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이유

50여 년 전 베트남의 중부지방은 베트남전쟁의 격전지였다. 수많은 한국군이 베트남 중부지방을 누비며 땀과 피를 흘렸다. 1964년 9월 11일 베트남으로의 첫 파병은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단으로 구성된 비전투요원들이었다. 하지만 1965년부터는 청룡·맹호부대 등 전투부대가 본격적으로 파병되었다. 첫 파병으로부터 1973년 3월 철수 때까지 8년 6개월간 32만 4864명의 청년들이 베트남에 갔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바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5천 명이 넘는다. 한국군은 왜 그곳에 가야 했던가.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것이 진정 주요한 참전 이유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의 유지비를 지원해야 하는 미국은 재정 부담을 이유로 한국군의 감군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군부세력이 기반이었던 박정희 정부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해외의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당시 냉전 상황에서 대북안보를 위해 주한미군이 가지는 전쟁억제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감군 대신 해외파병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는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개입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면서 존슨 대통령은 '더 많은 깃발'(more flag)을 외치며 동맹국들의 참전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최우방 영국과 캐나다, 프랑스가 참전을 거부할 정도로 전쟁의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한국은 참전 요청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던 참전 규모가 그것을 보여준다. 베트남의 자유 수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한국군의 감축이나 주한미군의 이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

참전을 결정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정부는 베트남전쟁을 통해 또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한국군을 간절히 원하는 만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고자 했다. 1966년 '브라운 각서'를 통해 한국 전투부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군사 원조뿐만 아니라 경제 원조를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후에 많은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하는 계기를 확보하였다.

 

미국이 한국에 참전을 적극적으로 요청한 데에는 몇 가지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인들과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이었고, 한국전쟁을 통해 상당한 전투경험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군의 유지비가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미군의 1/3도 안 되는 비용이었으며 다른 참전국인 타이(태국)군이나 필리핀군 유지비보다도 적었다. 엄청난 전쟁비용을 줄일 수 있는 유효한 방안이었다. 

 

그렇게 군인들과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의 성장 동력이 되었고 사회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저지, 베트남 국민들의 자유 수호라는 대외 선전용 명분 뒤에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요구가 있던 것이었다.

 

▲ 퐁니퐁넛마을 위령비는 한국의 시민단체 '나와 우리'가 현지 대학생, 현지 주민들과 함께 건립한 것으로 지역 역사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참혹한 진실, 민간인 학살

자랑스러운 대한청년들의 애국적인 참전으로만 기록되었던 역사 뒤편으로 참혹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1998년 2월, 시민단체 활동가 10여 명이 <피스보트 PEACE BOAT>에 참여한다. 중간 기착지인 다낭에서 '베트남전쟁의 한국군'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피해자로부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참가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토론과 함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한국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대해서 격론을 벌였다. 이들은 1년의 준비 끝에 1999년 4월에 현지 조사단을 파견하고 한 달여 동안 베트남 중부지방을 돌아다니며 피해자로부터 원통하고 참혹한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었다.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서 이에 대한 기획기사가 나오면서 한국사회에는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하였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하여 우회적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베트남 정부도 이에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얼핏 보면 문제가 정리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군에 의한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나라 국방부는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진상규명도, 인정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사죄를 하겠는가. 그리고 사죄를 받아야 할 당사자는 베트남 정부가 아니라 생존자와 유가족들이다. 

 

사죄와 배상, 그리고 역사 기록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는 90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생존자와 유가족은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몸과 마음에 생긴 상처는 아직도 고통스럽다. 재만 남은 집에서 맨몸뚱이로 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가난이 주는 삶의 무게는 더해만 갔다. 수많은 피해자가 사과받지도 못한 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 남기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50여 년이 지난 만큼 유명을 달리하고 있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직접적인 가해자와 정부뿐만 아니라 피의 대가로 만들어진 경제성장의 기반 위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일 것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문제는 정치적, 역사적 문제이면서 도덕과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의 행위가 미래세대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부의 책임 있는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내는 것과 함께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도 교과서에 기록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살아생전에 억울함, 한 맺힌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손을 잡아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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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4/06 [19:41]  최종편집: ⓒ 교육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