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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진실을 가르치는 자유인"
"운동에는 메아리와 울림·감동이 있어야"
 
윤지형 · 부산 해강고 기사입력  2018/03/21 [17:39]

 

전교조 제7대 위원장이자 전교조 합법화 바로 직전의 위원장 김귀식 선생님를 만나러 가기 전 내겐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다. 1934년생이니까 올해로 85세인 그는 정년퇴직을 한 지도 20년이 다 되어가는 노장. 그에게서 '그때 그 시절'의 교사로서의 삶이나 '흘러간 옛 노래'와 같은 전교조의 초기 역사를 듣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 그 시절'이나 '흘러간 옛 노래'는 낭만적 감상에 취하게는 할지언정 현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되긴 어렵기 마련 아닌가. 그러나 내가 서울행을 하기 직전에 받아본 그의 메일 인터뷰 답변서는 그런 내 의구심을 한방에 날려버렸다고 해야겠다. 전교조 30년 역사를 돌아볼 때 가장 잘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짤막하게 한 마디 썼던 것이다.    

 

"침묵의 교단, 그 깊은 침묵을 깼다는 거지요."

 

아, 그랬지……! 순간 내 귓전으론 저 1989년 전교조 결성의 봄날 '전교조 교사'들의 함성이 쟁쟁 들려왔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그가 새삼 떠올리게 한 노래 <참교육의 함성으로>는 '그때 그 시절'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노래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침묵'과 '반교육'이 2018년의 학교에도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과 그러기에 전교조가 앙망해온 교육 혁명은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이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요컨대 그를 만난다는 건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를 만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교단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김귀식 전 위원장     

 

'침묵의 교단'깬 전교조

1958년 3월 교사가 되어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두 달여가 지난  1999년 8월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그는 무려 40년이 넘도록 교직 인생을 살았다. "임진왜란은 빼고" 산전수전 안 겪은 일이 없다며 웃는 그에게 그 세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변곡점 같은 걸 몇 개만 말해달라는 청부터 했다. 그의 첫 대답은 과연 전교조 결성(1989)을 전후한 질풍노도 시절에 관한 것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성동고 분회 선생님들과 시장 골목 술집에서 '의식화 교육'에 대해, 그러니까 언론에서 '교사가 왜 노동자냐', '전교조 교사는 의식화 교사고 좌경용공'이라고 맹공하는 현실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어느 날 월간조선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 왔지요."

 

'자신을 <의식화 교사>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김귀식(55·서울성동고) 교사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이렇게 다소 낭만적으로 시작하는 월간 조선의 기사 제목은 '의식화 교사의 양심'(월간 조선 1989년 7월호). 여기에서 기자는 날카롭게도 '선생님 자신은 어떻게 의식화 되셨습니까' 라는 질문도 던졌는데 그의 대답은 '교사로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는지'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강제로 통과되던 날 경복고의 2학년 첫 교시 수업 시간이었어요. 한 학생이 귀에 꽂고 있던 라디오 리시버를 뽑아 책상에 내리치며 에이 씨, 어쩌고 분통을 터뜨리는 겁니다. 깜짝 놀랐지요. 너희들은 역사의식이 있구나! 그날 수업은 유신 헌법 치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토론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제자들이 나를 의식화시킨 거지요."

 

▲ 1998년 교원노조 법제화 방안 노사정위원회 합의에 즈음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귀식 전 위원장.     ©

 

"나는 언제까지나 '의식화 교사'"

그 나이 대에, 명문대 출신에, 웬만하면 교감·교장도 되었으련만 그 흔한 '주임' 자리도 제대로 한번 안 돌아온 건 왜였을까? "독재 치하에선 교장 안 한다"가 그의 소신이었다고 했다. 아니 그보다도 교사 김귀식에겐 교실에서 학생들과 수업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최고의 보람이고 기쁨이었다는 건 백전노장이 된 그가 유독 그런 얘기를 할 때면 절로 힘이 나는 것 같은 얼굴에서도 금방 드러났다. "'벼리반'이라는 특별반을 만든 적이 있어요. 4.19, 5.18 같은 것을 주제로 학생들이 자료도 수집하고 발표도 하는 그런 수업이었습니다. 인기가 많아서 복도까지 학생들이 꽉꽉 찰 정도였지요." 전교조 결성 당시 정직 3개월 징계를 받고 쫓겨 간 상계고에서의 일이다. 퇴학 위기에 처한 "깡패로 소문난" 녀석을 그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졸업시켰더니 대학도 가고 잘도 살더라는 얘기는 상계고보다 훨씬 전인 경복고 시절의 것이고, "학교마다 있는 호랑이 선생도 어쩌지 못하는" 아이가 김귀식 반에 와선 "순한 양"처럼 밝아졌다는 얘기는 혜화여고 시절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지론이 "문제아는 없다. 문제 사회, 문제 어른이 있을 뿐이다" 가 된 것이리라. 

 

교사 김귀식이 전교조 7대 위원장으로서 분투하며 살아낸 시간은 1997년과 1998년이다. 그의 말대로 "파란 만장" 그 자체였던 두 해다. 역사가 그랬으니 그의 삶도 그랬다. 1997년 초, 전교조는 '교원·공무원 노동기본권 확보 추진본부'를 발족하고 조합원 명단을 1천 명 단위로 신문 지상에 두 번 공개하는가 하면, 전국의 분회장 1,500명은 공개 장소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학교 안에 전교조가 엄연히 살아 있음을 정부와 세상을 향해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해는 IMF라는 살인적 한파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몰려온 때였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전교조 합법화에 대한 기대가 한층 고조되고 그해 말엔 교원노조법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가결되긴 했지만 전교조 교사, 그 중에서도 위원장 김귀식이 넘어야 할 산은 그야말로 첩첩하고도 험난했다. IMF 후폭풍으로서 구조조정의 일환이자 교육개혁의 한 과제처럼 대두된 교사 정년 단축 문제만 하더라도 엄청난 내부적, 사회적 논란을 불러왔다. 

 

전교조 합법화에 승리의 마침표

"내가 위원장 출마한다고 하니까 교장이 교문을 닫아걸고는 부장 교사를 시켜 감시하게 했어요. 그래 몰려드는 취재진을 교문을 사이에 두고 감옥에서 면회자 맞이하듯 만나 인터뷰도 하고 했지요."

 

그의 중화고 시절 얘기다. 그는 눈코 뜰 새 없는 속에서도 빠짐없이 학교에서는 수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퇴근 후면 전교조 사무실이나 집회 현장으로 달려갔다. "전교조 위원장이 수업 못한다는 소리가 나와 봐요. 말이 안 되지요." 그에게 위원장 출마를 처음으로 권유한 사람은 그의 아내와 중학교 동기동창이자 5·6대 위원장인 정해숙 선생님이었다. 이어 이수호, 이부영 선생님과 부산의 박순보 선생님도 가세했다. 처음엔 사양했다. 그러나 내내 그럴 순 없었다. 전교조나 노동단체의 집회가 있는 날이면 그는 거의 언제나 '원로 5인방'과 함께 참석했고, 거기에서 후배 교사들은 마이크를 들고 사자후를 토하는 선배 교사 김귀식을 자주 목도했던 것이다. 전교조 합법화에 승리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역사적 시기에 그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그 운동 대열의 가장 앞자리에 서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야말로 '진실을 가르치는 자유인'으로서……! (퇴임하던 해 펴낸 그의 교육수상록 제목이 바로 [교사는 진실을 가르치는 자유인]이다)

 

 

"에코(Eco)와 에코(Echo), 실천적 성찰"

1999년 6월 24일 오후 4시 중화고등학교 음악실. 정년을 두 달 남긴 교사 김귀식은 '21세기를 준비하는 바람직한 수업 형태의 모색'이라는 제목의 국어과 연구 발표회를 열었다. 고별 강의였다. 교육의 목표로 '깨달음, 감동, 자아발견, 두레 정신'으로 내세운 그날의 강의를 여기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천생 교사라는 사실이다. "무덤에 갈 때까지 나는 의식화 교육을 할 거고 그 운동을 할 거요."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가 퇴임 후 4년간을 서울시 교육위원으로 활동(2년은 의장으로)한 것도 보다 큰 학교에서의 의식화 교육이고 교육 운동이다. 화쟁사상(和諍思想)에 기반을 둔 그의 의정철학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그의 의정 활동 보고서의 제목은 "개혁과 화합은 둘이 아니다"인 것이다. 

 

끝으로 오늘의 전교조에 대해, 또한 전교조가 나아갈 길에 대해 한 말씀 해 달라고 했다. 그의 대답은 매우 시적으로 압축적이었지만 그런 만큼 내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자연(eco) 생태계가 있듯 운동 생태계도 있어요. 생태계를 살려야 합니다. 또한 운동은 메아리(echo)가 있어야 하고 울림과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번안하며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교조여, 에코 (Eco)와 에코 (Echo)에 대한 실천적 성찰로 거듭 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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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21 [17:39]  최종편집: ⓒ 교육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