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강좌] 두 4·3 소녀 이야기

오승학 · 제주 한라중 / 제주 4·3 70주년기념사업 | 기사입력 2018/03/0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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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강좌] 두 4·3 소녀 이야기
[영화 '지슬' 배경] 제주 동광리
오승학 · 제주 한라중 / 제주 4·3 70주년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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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0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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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 배경] 제주 동광리

 

'교사들에게 들려주는 교양강좌'에서는 선생님들의 숨은 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교사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지식·교양을 보내주세요(chamehope@gmail.com) 조합원들의 인문학 소양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제주 동광리가 고향인 두 4·3 소녀가 있다. 한 소녀는 당시 여섯 살이었고, 다른 한 소녀는 열두 살이었다. 먼저 여섯 살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006년 4·3 58주년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대통령(노무현)이 4·3추념식 참석하기 직전의 일이다. 이날 아침 필자는 4·3유족으로 4·3추념식 참석자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대통령 경호원에게 온갖 욕을 하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이유는 매년 4월 3일 아침마다 봉개동 4·3공원에서 친정가족 희생자들을 위해 참배를 해왔는데 경호원들이 제단에 가지 못하게 막고 있어서였다. 일반인들은 4·3추념식에 대한민국 최초로 대통령이 참석하는 상황이라 경찰과 행정의 통제에 협조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순박하게 농사를 짓고 있던 분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매년 자유롭게 참배해 왔었는데 갑자기 경찰과 경호원들의 통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오는 것이 뭔데 친정 부모님과 가족 제사를 못 지내게 하느냐"는 항의였다. 이 분은 정방폭포에서 부모님과 형제자매 등 가족 5명이 토벌대 군인의 총칼에 의해 무차별 희생을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죽어가는 부모를 울부짖으며 따라갔다. 

 

▲ 동광리 4.3길 무등이왓 마을과 팽나무   

 

▲ 4.3길을 안내하고 증언하고 있는 할머니(왼쪽)    ©

 

 

▲ 무등이왓 마을 소개 안내판    

 

국가가 소녀에게 저지른 일

 

그런데 누군가 이 소녀가 따라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밀쳐서 뒷머리가 돌에 부딪혀 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쑥으로 상처를 감싸주었고, 운 좋게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 지금도 이분의 뒷머리를 보면 움푹 패인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모를 잃은 여섯 살 소녀는 남의 집 외양간이나 움막에서 밤을 지내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고아원 생활을 하다가 커서는 사찰에서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국가는 이 소녀에게 가족과 집 등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대한민국 군인이 오히려 그 소녀의 모든 것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국가는 이 소녀에게 구체적인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4월 3일 4·3평화공원에서 돌아가신 가족을 위해 정성스럽게 마련한 제물로 최소한 예의를 표하는 참배마저 막는다는 생각에 가슴 속에 내재된 피맺힌 원한으로 항의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성향의 대통령이었다면 경찰을 동원하여 물대포를 쏘거나 몽둥이로 제압했을 수도 있다. 

 

참배를 위해 가져온 제물을 내던지며 항의하는 이 어르신을 어찌 할 수 없어서인지 경호원 몇 명이 급히 이 분을 안내하여 4·3위령제단에서 참배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20분 정도 지나 노무현 대통령이 행사장에 입장하고 58주년 4·3추념식이 거행되었다.

 

제주 동부지역에 있는 북촌리 마을이 하루 만에 가장 많은 마을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이라면, 동광리는 제주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고,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곳이다. 군경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지금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이곳은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주민들이 주로 목축과 조·메밀·콩 등을 재배하며 순박하게 살던 중산간 마을이었다. 교육열이 높아 일제시기인 1939년에 2년제인 동광간이학교가 건립되어 원근 각처에서 신교육을 받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70여 년 전 동광리 무등이왓은 130호나 살고 있던 중산간의 큰 마을이었는데, 4·3의 광풍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휘몰아쳤다. 4·3사건 당시 마을이 불타 버리자, 주민들은 마을 인근 도너리오름 앞쪽의 큰넓궤에 숨었다. 큰넓궤는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얼마 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연 동굴이다. 이곳은 '지슬'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동광리에 가면 4.3길 안내를 하고 있는 82세의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 이분이 두 번째 동광리 4·3소녀이다. 이 4·3소녀는 70년 전 당시 열두 살이었는데 동굴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50여 일 동안 캄캄한 동굴에서 생활할 때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빛이라도 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라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마을사람 130여 명이 생활하며 감자 등 소량의 식량으로 연명하였다. 군경토벌대가 오면 마른 고추를 태워 들어오지 못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당시의 동굴에서의 생활은 '지슬'의 영화보다 더 참혹했다고 한다. 130여 가구가 오순도순 살았던 동광리 무등이왓 마을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주민 160여 명이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무등이왓이 고향인 이 4·3소녀는 큰 팽나무 밑에서 동생들을 돌보았던 평화로웠던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어르신이야말로 4·3증인"

 

그리고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학살 상황을 어제 일처럼 전한다. 평화의 공간이던 무등이왓에서 마을 주민 19명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희생된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러 온 주민들에게 인근에 잠복해 있던 군경 토벌대가 다시 총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동광리 4·3길을 탐방하다 보면 잠복 학살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팻말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무등이왓의 동산에 민가가 있었던 밭이 나오는데, 늙고 병든 어머니를 혼자 두고 피신할 수 없어 같이 남아 있다가 학살당한 아들이 있었다 한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돼지우리에 숨어살다 결국 굶어 죽은 참혹했던 사연, 또 일가족 모두 몰살당해 후손이 없는 집안이 된 사연 등 동광리 주민 또는 제주도민이었기에 감내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다.

 

당시 환난 가운데 살아남은 제주의 소년, 소녀들은 4·3의 고난과 아픔을 딛고 지금의 제주를 일구어 왔고, 4·3 당시의 상황을 제주어로 진솔하게 증언한다. 4·3의 참혹한 고통과 아픔, 생지옥과 같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온 이 어르신들이야 말로 4·3의 증인이요 제주의 진정한 영웅이다. 4·3 당시의 아픔을 알고 있는 역사의 증언자 두 4·3 소녀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등이왓'과 '큰넓궤'는 제주도의 자본우선주의 정책에 의해 점차 사라져 갈 위기 속에 있다. 공무원들은 이곳이 사유지이고, 다른 4·3유적지도 보존할 곳이 많다는 논리로 역사현장 보존에 손을 놓고 있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과 '큰넓궤'의 토지 매입이나 보전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 인근의 신화공원 놀이시설이나 상류층을 위한 영어교육도시에 수천억을 투자하고 최고의 관리를 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제주의 아픔을 간직한 동광리 잃어버린 마을, 4·3유적 보전과 4·3역사교육을 위한 전국교사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제주4·3은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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