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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 광화문 광장의 역사읽기
식민지배, 분단, 독재 흔적 곳곳에
 
이순우 ·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기사입력  2017/12/12 [17:02]

 

 

"이호예병형공" 

 

조선시대 중앙행정기구인 육조관아의 암기식 명칭이다. 누군가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하겠지만, "태정태세문단세…"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입에 달라붙어 있는 용어의 하나이다. 바로 이들 육조관아가 포진하고 있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경복궁 앞 큰길은 '육조전로' 또는 '육조앞길'로 일컬어졌다. 지금은 세종로가 공식명칭임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의 현장으로 깊이 각인된 '광화문광장'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간혹 이곳 광장 일대를 둘러보다보면 주변에 포진한 여러 건물이나 공간들의 내력이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정부서울청사는 그렇다고 쳐도 왜 세종로의 한복판에 세종문화회관이나 KT광화문지사나 미국대사관이 들어서 있으며, 또한 군데군데 공원으로 조성된 공터들이 남아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이 그것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고종 초기만 하더라도 경복궁의 복원과 삼군부의 부활에 따라 부분적인 공간조정이 있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육조앞길의 외관이나 기능은 대체적으로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과 더불어 전통적인 육조제도가 파괴되고 '8아문(衙門)' 시기를 거쳐 '7부(部)' 편제로 중앙행정조직이 전면 개편되면서 공간변화 역시 가속화되었다.

 

근대적인 제도개혁이 잇따라 시행됨에 따라 경무청, 경부(警部), 헌병사령부, 통신원, 양지아문, 한성재판소, 법관양성소 등 새로운 관청이 생겨나 옛 육조관아의 이곳저곳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노골화되면서 핵심 중앙관서인 외부, 법부, 군부가 폐지되고 농상공부와 탁지부 같은 기관은 광화문 앞길에 벗어나 여타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기관들이 점령한 광화문 일대의 전경이다.      © <일본지리풍속대계> 제16권, 1930

 

경술국치, 식민통치의 옷을 입다

 

이들 기관이 사라지거나 빠져나간 자리는 통신관리국이나 법무원, 그리고 경성헌병분대와 같은 통감부 소속 기관들의 차지가 되었다. 가령 외부가 있던 자리는 그 자체가 1906년 2월 이후 그대로 통감부 청사로 대체되어 이들이 남산에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겨갈 때까지 1년 가량을 이곳에 머물렀던 시절도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광화문 앞길 동편으로 경기도청, 경기도 경무부, 임시토지조사국, 경찰관강습소, 경성법학전문학교 등 총독부의 소속관서가 포진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서편에는 조선보병대, 경기도순사교습소, 조선군사령부부속청사, 광화문전화분국, 체신국 청사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그야말로 식민통치권력의 본거지와 같은 구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1938년 4월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청량리로 밀어내고 전시 체제기의 재정수입 확충을 전담할 전매국 청사를 1940년 6월 그 자리에 건립했다. 이후에는 주요 통신수단인 전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 9월에 이르러 경성중앙전신국이 이곳을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이곳은 여전히 서울중앙전신국과 서울국제전신전화국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1979년에 종래의 건물이 철거되고 1984년 국제통신센터가 새로 건립되었다. 이때 길 건너편에 있던 광화문전화국도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 구역은 결과적으로 식민통치자들의 필요에 따른 배치 구도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식민 거리에서 분단, 독재의 거리로

 

세종문화회관이 서 있는 구역은 원래 조선시대에는 병조와 형조가 있던 곳이다. 근대시기 통신원과 통감부 통신관리국을 거친 이후 식민 통치기에는 총독부 통신국과 체신국이 줄곧 자리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옛 총독부 체신국 청사는 완전히 소실되었다. 자유당 시절인 1955년 11월 이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80주년을 기리며 우남회관(雩南會館)이 건립되었다가 1972년 12월 대형 화재사건을 겪은 끝에 1978년에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세종문화회관 옆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이래 광화문 전화국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과정에서 불타 버려 1962년에 재건되었다가 불과 25년만인 1987년 철거해 세종문화회관의 관람객을 위한 주차공간과 휴게 시설인 세종로 주차장(지하)과 세종로 공원(지상)으로 탈바꿈했다. 이를 테면 분단과 독재시대가 만들어낸 공간 변화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과 세종로주차장을 만들어낸 셈이다.

 

▲ 한국전쟁으로 공토로 변한 옛 경찰관강습소 터에서 1958년 2월에 한국일보 주최 연날리기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다.     ©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개발 독재의 상징 - 미대사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길 건너편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곳도 공간변화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 옛 경기도청 자리의 남쪽에는 총독부 시기 일제경찰 양성소인 '경찰관강습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 역시 한국전쟁 시기에 말끔히 불타버리고 공터만 남게 되었는데, 1958년 정초에 연날리기대회가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흥미로운 신문기사도 찾을 수 있다. 그 앞에 유일하게 콘크리트 건물인 경찰참고관이 남아 있었는데 1958년에 난데없이 반공회관이 되었다가 4.19혁명 때 불탄 뒤 철거되어 사라졌다.

 

바로 이 공터에 1961년 새로 건립된 건물이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미국 대사관으로 사용되는 쌍둥이 빌딩이다. 이 당시 흔히 유솜(USOM)으로 알려진 주한미국경제원조처가 건물을 무상으로 지어주는 대가로 그중에 하나를 자신들의 사무공간으로 직접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솜의 조직과 기능이 크게 약화되자 1970년 12월에 을지로에 있던 미국대사관이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북쪽에 있는 건물(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은 당초 정부신청사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하필이면 건물이 완공되던 때가 5.16쿠데타 직후의 시점인 탓에 이른바 '혁명주체'에 의해 설치된 군사혁명최고회의가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제3공화국 시절인 1963년 12월 이후 1986년 2월에 정부과천청사가 생겨날 때까지 이곳은 경제기획원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은 가히 군부독재와 개발독재 시절의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듯 광화문광장 일대는 조금만 찬찬히 살펴보더라도 근대 개항기 이후 국권침탈과, 해방 이후 분단 및 군부 독재시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근현대사 교과서의 축약판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일러주지 않는다면 이곳에 일제의 통감부가 자리했고, 일제 경찰의 양성소인 경찰관강습소가 있었으며, 왜 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서 있는지에 관한 내력을 어찌 알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현재 광화문광장의 주변 바닥에는 옛 육조관아를 비롯하여 의정부, 삼군부, 사헌부, 중추원 등의 위치를 나타낸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대시기 이후 이 거리에서 벌어진 무수한 굴곡과 수난의 역사를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까닭에 서둘러 이에 관한 개선안이 마련될 시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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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12 [17:02]  최종편집: ⓒ 교육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