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하는 고교생들. 이 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련 없음. © 안옥수 기자 | |
“묵과할 수 없다.”
지난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학생들의 70%가 6·25를 북침이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 교육이 잘못된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면서 던진 경고다. 그러면서 “역사왜곡은 아이들이 가져야 할 애국심을 흔드는 일”이라고 학교와 교사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박 대통령 ‘북침’ 발언, 언론이 생중계...“우민화”? 박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에 교육계는 바짝 긴장했다. 교육부는 곧바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학생들의 상황을 잘 아는 교사들은 대부분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70% 북침설’의 근거가 된 <서울신문> 설문이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석연찮은 점이 있었기에 더 그랬다.
지난 11일 보도된 <서울신문>의 설문조사(입시업체가 전자메일을 갖고 있는 고교생 506명 대상)의 문항은 ‘한국전쟁은 북침인가, 남침인가’였다. 이런 엉성한 설문조사 결과를 정말이라고 믿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진중권 동양대 교수 등 상당수 지식인들은 “이것은 역사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국어교육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생들이 ‘북침’이란 용어를 ‘북한의 침략’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방송과 주요 일간지들은 잇달아 <서울신문>의 설문결과와 박 대통령의 ‘묵과할 수 없다’는 발언만을 키워서 보도했다. 이들 언론보도만 접한 국민과 대통령은 ‘학생 70% 북침설’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됐다. 보수언론의 왜곡보도에 의한 ‘우민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전교조 <교육희망>이 ‘6·25 한국전쟁에 대한 서울지역 중고교생 의식조사’를 한 까닭은 이런 ‘우민화’ 상황을 다소나마 깨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이번 사태의 최대 원인제공자인 박 대통령을 위한 헌정조사인 셈이다.
‘6·25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나’ 물었더니... 이번 조사의 질문 내용은 ‘6·25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다고 생각합니까?’였다. 이 질문은 2004년 5월 국가보훈처가 진행한 설문 내용과 같다.
조사는 19일 무작위로 뽑은 서울지역 10개 중고교에 다니는 학생 1499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5%p’였다.
이번 조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면대면 단일 질문응답 방식으로 벌여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 하지만, 답변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질문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의 부연설명도 하지 않은 채 진행했다.
결과를 살펴보면, 89.4%의 학생(1341명)이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남침)”고 답했다. “남한이 일으켰다(북침)”는 답변은 3.3%(49명)였다. 7.3%(109명)의 학생들은 “러시아, 중국, 미국, 모르겠다” 등 기타 의견을 나타냈다.
이번 설문 결과는 “69.0%가 ‘북침’이라고 답했다”는 박 대통령의 인용 결과와는 전혀 상반된다. ‘남한의 북침’이라는 답변은 3.3%로 박 대통령이 인용한 수치인 69%에 견줘 21배나 차이가 났다.
반면, 이번 설문결과는 국가보훈처가 2004년 5월 청소년(초등학교 5학년 이상 초중고생 대상) 4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호국·보훈의식 여론조사’ 결과와는 편차가 크지 않았다. 당시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는 질문에 0.7%가 ‘남한’이라고 답했고, ‘북한’이라는 응답은 54.5%였다.
역사교사모임 “특정 정치집단의 시각으로 개입하면 교육 무너져” 이성호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서울 배명중 교사)은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대통령의 초강경 발언은 교사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면서 “대통령의 이 같은 대응이 역사교사들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감을 키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언론은 이 설문조사가 허황된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대통령의 발언만 집중 보도한 것은 언론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면서 “특정 정치집단의 시각에서 근거 없이 부풀려진 조사결과를 놓고 역사교육에 개입하려 한다면 교육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질문이 너무 유치해요.”
이번 설문지를 본 서울지역 교사들이 던진 말이다. 하지만 “‘소 잡는 칼로 모기를 베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비슷한 기사를 <오마이뉴스>(
www.ohmynews.com)에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