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째 환각
내가 속한 학교는 AIDT(AI디지털교과서) 선도학교다. 신청과 선정은 겨울방학 사이 관리자를 중심으로 신속히 진행되었다고 한다. 불안정한 시스템과 지침 속에서 3월 내내 아이들을 가입시키고 사이트에 접속시키는 일로 교실마다 홍역을 치렀다.
“선생님! 마이크가 안 돼요.”, “소리 안 나오는데요?”, “와이파이 비번 뭐예요?”, “디지털패스 그거 인증 안 되는데요?” 책상 사이를 오가며 단순하지만, 손이 가는 문제들을 처리하고 나면 수업 시간 대부분이 흘러 있었다. 교육청은 한 달 후에야 디지털 튜터를 선발해 인력 지원에 나섰지만, 초기 진화에 투입된 심신은 너덜너덜해지고 계획한 교육활동은 몇 주씩 밀려났던 기억이 난다. (세세히 남기기 어려운 문제가 부지기수였다. 큰 예로 NEIS 시스템의 기초 시간표와 실제 사용 시간이 어긋나면 접속 자체가 불가능해, 보결이나 시간표 변경이 필요한 경우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 문제는 시간마다 빠르게 드러났지만, 해결은 학기를 넘어 더디게 이루어졌고, 그 간극은 교사들이 맨몸으로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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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세종지부는 지난 1일 AI시대, 인간과 교육을 주제로 김재인 교수 초청 특강을 진행했다. © 전교조 세종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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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정치 지형의 변화와 함께 AIDT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었으나 별다른 설명 없이 접속을 멈추라는 메시지만 있었다. 정책 긍정성을 이야기하던 소수의 교사마저 교과 운영 방법을 선회했다. 10월이 되어서야 사용이 재개되었는데, 사용하지 못한 달에도 구독료(학생 별로 낸다!)가 그대로 지출되었고, 역할을 잃은 채 학교를 오가는 인력이 남아있었다. 현장에서는 준비되지 않은 정책의 뻔한 실패를 누차 예고해 왔다. 막대한 예산은 어처구니없이 증발했고 책임지는 이는 없었다(나는 주요 보직 교체가 책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공적 책무의 판단 오류에 왜 정책적 책임을 묻지 않는지 분한 마음이 든다. 그보다 이 사이에 발생한 학습 손실이 고스란히 아이들 몫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연수에서 강조했던 ‘쌍방향성’과 ‘맞춤형 교육’은 실제로 구현되지 않았다. 낮은 점수 영역을 문제 제시로 보충하는 것이 개별화의 실체였다. 기존의 문제풀이식 학습이 기기로 구현되었을 뿐이다. 관리자용 페이지에 학생들의 점수 정보가 있었지만, 교사들은 정작 아이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타인을 경험’하러 오는 학교에서 개별 기기와 화면 앞에 아이들을 매어놓고 각자의 학습을 진행하는 것은. 이 기이한 상황은 몇 가지 생각의 전형에서 비롯된다. 배움을 교수 중심으로 전제하고 교사를 N개의 기기로 대체시킨다는 발상이 그 하나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간과 상황에 따라 달리 배우고, 교사뿐 아니라 맥락에서 배우며, 서로에게서 배운다. 교사의 언어가 또래의 언어로 번역될 때 오히려 더 잘 배우기도 한다.
두 번째는 입력(input)하면 출력값(output)을 구할 수 있다는 자판기식 교육관이다. 교육이라는 함수가 작동하는 방식의 관건은 과정(throughput)이라는 블랙박스에 대한 탐색과 고민, 조절과 변화에 있다. 학력으로 산출되는 교육 효율성에 마음이 조급해지면 이 과정은 손쉽게 생략된다. 개별 맞춤형 교육이라는 공교육의 신기루는 디지털교과서라는 거품에 사로잡혔고, 결론적으로 우리는 (혹은 알면서도) 속고 말았다.
#2. 두 번째 환각
비슷한 교육계의 환각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이번 주연배우는 생성형 AI다. 그리고 사회 변화 전반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더 전면적이다. 디지털교과서는 과거 ICT 교육을 답습했다는 점에서 예상가능한 실패였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인류 역사가 처음 겪는 문제다. ‘AI 빅뱅(김재인, 2025)’이라 부를 만큼 폭발적인 파급력과 변화 앞에서 압도감과 더불어 인간 소멸의 공포마저 느끼게 된다. 이 놀라운 기술 앞에서 학교는 늘 그렇듯, 과거의 전통과 축적된 유산을 전수하는 동시에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삶을 예측해야 하는 이중구속적 현재에 묶여 있다. 기술 혁신을 바라보는 균형추의 머뭇거림 안에는 오늘의 우리가 진부하고 고답적이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아닌가 싶은 불안이 담겨 있다. 교사로서의 보수적인 결정이 시류를 놓치고 미래의 아이들을 도태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AI의 교육적 활용을 고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김재인 교수의 전언은 명료하다. “인간의 지능은 쓰지 않으면 퇴보한다.” AI 활용은 역량 증폭기의 역할을 하기에, 어떻게 증폭할까가 아니라 ‘역량’ 자체의 유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학교 교육은 역량 그 자체를 축적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이제 노동지식시장이 제공하던 숙련의 기회는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AI는 증강 기술을 통해 고숙련자와 저숙련자 간 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성인이 되는 세대는 디스킬(탈숙련) 제너레이션이다. 흔히 말하는 직업 소멸은 AI가 일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이 아니라, AI를 잘 다루는 동일 직종 내 동료에게 흡수되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AI 활용 능력 이전에, 나에게 갖추어지는 ‘맨몸 역량’, ‘밑천 역량’이다. 구체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언어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듣자 하니 이것이 교육과 학습의 과정적(throughput) 블랙박스를 생성형 AI에게 위임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량을 축적하는 오롯한 과정을 개개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살아내지 않으면- 인류에게 지성과 뇌는 보존되기 어렵다. 김 교수는 ‘인지란 정보를 습득·저장·인출·사용하는 전 과정으로, 사고·지각·주의력·기억·추론·판단·학습 등 인간의 마음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라 설명한다. 결국 추론의 과정에서 사안에 대한 정당성을 검토하고 타자의 감정을 이해하며 공적 책임을 사유하는 종합적 과정이 지능인 것이다. 어찌하여 확률적 패턴 조합 기술에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일까? 어긋난 지능관이 깃들어 있는 명백히 잘못된 명명이다. 또한 AI 활용 교육을 맞춤형 교육으로 주장하는 것은 학습자 간 차이를 자료 제공의 차별화라는 방식으로 축소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더 잘 배울 수 있다면’이라는 마음으로 동의한 기술 수용 역시 여전히 착시와 환각 속에 있었음을 확인하는 대목이었다.
#3. 생성(산출)이 아닌 생성(되어감)으로
한편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 등장 이후 인간다움을 묻는 질문이 많아진 것을 기쁘게 여긴다. 인간의 본질을 둔 진지한 대화들이 일상에서 오가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필연적으로 연동된다. 기술 혁신이 주도하는 매끄러운 교실, 아이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학습 환경과 자료를 척척 제공받고 있으리라는 착시의 뒷면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에게 망설임과 주저함은 왜 필요한가. 단차 없는 편리함 속에서 ‘딸깍’ 한 번이 불러들이는 유창함과 풍부함. 경계마다 인식되고 고민되어야 할 모든 장애가 소거되고 해소되는 사이, 기계의 추천에는 의존하면서 인간에게서는 독립하려는 이성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인류가 축적한 지혜의 소산은 삶의 면면에서 덜컹이는 몸과 마음의 불편함,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의지와 희망이 전부 아니었을까.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그를 알아차리고 둘러보며, 근대 ‘이성’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과 끊임없이 연결하고 확장하려 한 노력의 연장 아니었던가.
10년 전 스마트 교실이 구축되었을 때 교원 연수의 8할을 교육용 앱 소개가 차지했던 것처럼 AI 활용 연수도 심급은 건드리지 못한 채 활용법만 난무하나 보다. 그런 차에 이번 특강은 더없이 반갑고 후련했다. 나는 이날 마침 오래된 벽돌책 『천 개의 고원』에 역자 사인을 함께 받았다. 새삼스럽지만 그가 들뢰즈 연구자라는 점은 많은 것을 환기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변형이 배치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과정적 미학으로서 주체의 의미를 생성(devenir, becoming; 되어감)이라 불렀다. 프롬프트의 결과값인 생성(generation; 산출)이 같은 단어를 대체하고 있는 지금, ‘되어가는 중간 상태 자체’로서의 본질을 떠올리게 된다. 결과값에 집중하는 기술 논리가 만연하지만 교육은 여전히 그 과정에 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질문의 답처럼 생성형 인공지능 너머 생성형 인간지능이 설 자리는 여전히 깊고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