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 꼬마들과 강원도 양양 지역 행사에서 노래하는 노미화 선생님 © 노미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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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큰맘 먹고 집을 나섰다. 아침도 거른 채 가방에 책 여섯 권과 공책을 챙겨 매고 지팡이도 짚었다. 하필 비가 오네. 우산까지 챙겨들고 강릉까지 남편이 태워주는 대로 방통대 학습관이라는 곳에 가서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이다.
올봄부터 갑자기 강의 듣고 책 보고, 불어단어 찾고 외우고, 과제물도 내고 기말고사까지.... 나도 내 모습이 신기해서 힘든 줄을 잘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지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 힘든 내색을 못 한다.
강릉 학습관은, 생각보다 넓고 크고 웅장한 독립 건물이었다. 남편에게 나는 3층까지 데려다 달라고 졸랐다. 천하의 길치, 게다가 다리도 시원찮은 나. 남편은 폐가 안 좋아서 뭘 좀 하면 숨이 차서 힘드는데 이럴 땐 내가 그에게 의지한다.
시험이 끝나는 대로 나는 12시 50분 출발 인천행 고속버스를 놓치지 말고 타야 한다. 오늘은 10년 만에 인천공부방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혼자 가는 인천행이니 나는 여기까지만 남편을 수고하게 하고 헤어졌다.
휴~! 이제부터 내가 알아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8시 40분에 입실해 9시부터 12시까지 여섯 과목을 연달아 객관식으로 풀어야 한다. 처음으로 해보는 테블릿으로 푸는 시험, 프랑스어학과는 헤드셋도 준비하라는 문자가 왔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겠지.
결국 나는 강의실 가득 메운 학생들이 다 떠나고 최후의 일인으로 남아 시험관이 “그만!”할 때서야 일어섰다. 시험장을 나설 때, '수고했어! 프랑스어로 가득한 150문제를 다 읽고 열심히 풀었으므로 최선을 다 한거야!'하는 소리가 내 맘속에서 저절로 들렸다.
다시 가방 메고 지팡이를 짚고, 1층으로 내려가 사정을 이야기하니 안내원이 바로 그 자리에서 택시를 불러서 태워주었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나는 김밥과 캔커피를 사들고 버스 기다리는 곳에 앉아 허기진 배를 채웠다.
웬만하면 이런 날, 혼자서 인천까지 갈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작년부터 만나자고 의논했던 일이고 며칠 전에는 십정동의 해님공부방 선생이었던 분이가 “선생님 안 오시면 저도 안 갑니다.”하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결심을 했다. 그는 내가 인천에서 전교조를 시작하던 무렵 십정동에서 공부방을 열심히 하던 어여쁜 친구였고, 지금은 스님이 되었다는데 머리 깎은 그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 해직교사 시절, 인천 공부방 일꾼들을 만나 식구처럼 지냈다. © 노미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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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천에서 해직 시절에, 분이를 비롯한 인천의 공부방 일꾼들을 만나서 식구처럼 지냈었다. 어린 아들 평원이를 업고 다니면서 송현동, 만석동, 화수동, 효성동, 계산동... 산동네 구석구석에서 일하는 이 씩씩한 노처녀들이 좋아서 정신없이 좇아다녔다. 그토록 부르짖던 복직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지금은 그 산동네가 다 사라져 공부방들이 대부분 없어졌으니 잘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 이제 인천은 빈민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고 보면 될까.
그때 우린 어린이날 행사로 '야야! 이리 나와라!'를 열었고 가을엔 부평성당을 빌려서 발표회를 준비했다. 손글씨로 써서 다달이 펴낸 <인천공부방>이 지금도 우리집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있다. 우리는 전교조에서 만든 모든 참교육 물건, 노래 테이프, 교육관련 책을 함께 듣고 보고, 교육지도안을 짜고 아이들 이야기에 날이 새는 줄 모르도록 열을 올렸다. 가진 것이 없고 힘없는 사람끼리 뭉치면 힘이 솟는 모양이다. 그때만큼 가슴 뛰는 날들이 또 있었는지 싶다.
인천교대생들이 공부방 자원교사로 오고, 교대 학생회가 어린이날 행사에 합류하면서 어린이날 행사는 점점 커져서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계산동의 인천교대 교정에 모여서 큰 잔치를 열게 되었다. 빈민운동에 뛰어든 공부방 선생님들은 착하고 성실하고 어여쁜 노처녀들이었다.
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참교육자라고 믿어의심치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맘속 깊이 그들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이래서 먼길을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기운도 없는 할머니가 옛동무들 만날 기쁨 하나 가슴에 가득 담고서.
▲ 열한 명의 인천 공부방 일꾼들이 인천 계산동 아담한 아파트에 모여 밤을 지샜다. © 노미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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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터미널에서도 한참을 가야 계산동이다. 거기에 현정씨 내외가 사는 아담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마치 집 나간 아들이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듯, 일제히 나를 반겨주었다. 처음 본 현정씨의 남편도 공부방을 함께 해서 그런지 오랜 친구처럼 함께 이바구를 나누었다. 그는 인사를 마치고 일어나 엄마 집에 가서 자겠노라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야호~ 이 아파트에서 우린 맘껏 떠들고 먹고 자고 밤을 지샐 것이다.
모두 열한 사람이 모였다. 흰 모자를 얌전히 쓰고 있는 분이(지웅스님)는 여전히 해맑고 여리여리한 몸에 경상도 억양이 그대로다. 구청에서 큰 살림을 맡아하는 조인영 목사(지금은 센터장)는 여전히 씩씩한 여전사인데 좀 멋쟁이가 되었다. 내년에 퇴직을 하면 완주에 집을 마련해서 농사도 하며 새로운 삶을 지낼 거라고 새로운 우리들의 아지트를 만들자고 한다.
문경에서 오지 못한 윤정이는 비단 조각으로 만든 나비 모양의 브로치를 만들어서 정성껏 포장해서 모두에게 선물로 보냈다. 기정떡을 준비해 오신 지웅 스님은 그 좋은 솜씨로 수채화를 그린 예쁜 책갈피를 만들어서 선물로 들고 왔다. 미싱 선수가 된 집주인 현정씨는 모두에게 줄 선물로 큼직하고 멋진 천가방 속에 여름 잠옷바지를 넣어서 전해준다.
아유~ 눈물 나! 나눠주고 나눠먹기 좋아하는 그 마음 그대로네. 우린 늘 산동네 '나눔 어린이집'에서 연합회 모임을 했었지. 좁은 부엌에서도 그 많은 식구가 푸짐한 밥상을 뚝딱 차리던 그 시절이 지금 이 집의 진수성찬과 겹쳐서 떠오른다. 그땐 산꼭대기 수도국산 그 작은 집들 틈바구니에 있는 그 집이 너무나 든든한 이들의 안식처였다.
반가움과 궁금함, 겪은 일들로 이야기가 무르익다가 한밤중이 되었을 때 분이가 지웅스님의 사는 얘기로 넘어갔다. 조용한 목소리로 차분히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는데 언젠가 법정스님을 만나 수련회를 참가하고서 불가(佛家)에 들어가고픈 마음이 컸지만 그땐 공부방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너무나 비겁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못했다고 했다. 나중에 공부방이 다 끝나고 그는 소리없이 우리와 멀어졌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고 고맙고 기특하고... 박수가 터진다.
수다를 떨다가 시집 제일 잘간 사람은 오늘의 집주인 현정이가 1등, 그 다음은 누구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3등은 ‘노미 쌤’, 바로 나라고 한다. “왜? 나가 얼마나 불행한디?” 그러자 다들 웃었다.
'나눔의 집' 대장이었던 명자 샘은 진도에서 만나 부부가 된 남편이 암투병 중이라서 못왔고. 문경댁 윤정 씨는 농삿일이 너무나 바쁘다. 나머지 열한 명이 빠짐없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다들 감개가 무량한 듯 하다. 내년에 또 다 모이자고 굳게 굳게 약속을 했다. 한밤중에 회장을 뽑아야 된다고 누가 외쳐서 족히 한 시간을 찬반 격론을 벌인 끝에, 내년부터 연장자순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대신 총무는 젊고 유능한 후배가 같이 자청해서 한다나. 이래서 내년 회장은 동숙 씨(전 인천지부 간사)가 맡게 되었고,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내가 26년도 인천공부방 연합회 회장이 될 참이다. 내참! 단체명이라도 바꿔야 되겠다.
▲ 설악어린이 노래잔치에 동네 꼬마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 노미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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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겨 이틀을 누워서 몸을 풀었나 보다. 어디 한번 다녀오면 며칠은 고된 몸을 쉬어야 한다. 금요일에는 양양에서 전교조 강원지부가 주최하는 설악어린이 노래잔치가 있었다. 목요일에 동네 꼬마들이 우리집에 와서 노래연습을 했다. 정작 노랫말의 주인공인 아랫집 라온이는 절대 무대에 안 올라간다고 때를 썼다. ‘아, 4학년이 되었으니 벌써 사춘기구나.’ 나도 그 못지 않게 떨리는데 우선 입을 옷이 걱정이었다. 고심 끝에 고른 하얀 블라우스에 윤정이가 보내준 나비 브로치를 달고나니 좀 용기가 생겼다.
다음날 리허설을 하러 무대 위에 오르는데 은근슬쩍 라온이가 함께 올라오네. 이래서 라온이와 동생들 셋, 이렇게 해서 동네꼬마 넷과 예쁜 브로치를 단 ‘노미 할머니’는 손을 잡고 무대 위에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천상병 시인이 그랬던가 인생은 한바탕 소풍이라고. 할머니가 되고 보니 집을 나서면 하루하루가 인생 나들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