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교사에서 화물 운송자가 되었다. ©정익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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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교사에서 화물 운송자가 되다
1983년부터 음악교사로 살다가 2021년 8월 정년 퇴직 이후 1톤 트럭을 몰며 화물운송 종사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천근만근 몸이 무겁고, 귀가할 때는 계단을 오르면 다리가 휘청거린다. 하루 종일 운전석에만 앉아 있었기에......
연금이 나오는데 왜 이런 힘든 일을 하느냐, 없는 사람들 먹고 사는 일자리 침해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내 코가 석자라 쉴 수가 없었다. 퇴직하고 보니 아내가 나 모르게 투자하였다가 실패한 금액이 억대가 되어 있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이었다. 퇴직 수당과 교원공제회 적금 든 것으로도 다 갚아지지 않아 기숙사 사감, 음식 배달 일 등을 조금 해 보다가 내 적성에 맞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길 좋아했고 주말이나 방학 때면 차를 몰고 나가서 하루 종일 운전하며 구석구석 다니며 차박을 하고 지회에서 답사 다닐 때면 늘 내가 운전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마침 주변에 퇴직하고 용달 트럭을 몰며 화물 운송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일을 배워 1톤 전기 트럭을 구입하니 권리금 없이 노란 번호판을 달고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주로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이나 재료를 싣고 다른 공장으로 이송을 하는데 지게차로 옮기니 큰 힘은 들지 않는다. 공산품을 위주로 농수산물과 간단한 이삿짐 등 시체만 빼고는 다 옮긴다. 다만 결박을 잘 해야 한다.
▲ 천창수, 고 노옥희 울산시교육감 부부와 함께 찍은 우리 부부 사진 (맨 왼쪽이 필자) ©정익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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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 몸을 싣고 전국을 달리다
일을 시작한 지 두어 달 되었을 때 대구 농수산물 시장에서 수입 포도 상자를 싣고 울산 농수산물 시장으로 가져다주는 일을 잡았는데 플라스틱 상자가 부실하고 2m가 넘는 높이로 파레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결박이 부실하여 고속도로 오르기 직전 굽어진 일반 도로에서 짐이 쏟아져 교통 경찰이 출동하여 도로를 정리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100상자가 넘는 포도를 변상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달려온 후배 교사들이 포도 상자를 들고 나가 그 밤에 동료 친지들에게 강매를 하여 50여 상자를 처리하고 나머지는 지부 사무실에 가져다 놓으니 사흘 만에 다 소비되어 큰 손해 없이 마무리가 되어 전교조의 힘을 다시금 깨닫는 일도 있었다.
그 후에도 사소한 사고는 여러 번 있었다. 후진하다가 공장 문을 들이받아 변상하기도 하고, 장마철에 의류 제품 상자가 젖어 변상한 일은 손해가 컸다. 선거가 있을 때는 선거 유세 차량으로 개조해서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이지만 뜻깊은 추억거리가 되었고 개조한 차량 길이가 길어지고 높아져 후진하다가 접촉 사고가 발생하여 여러 번 변상하였다.
월성 원자력과 서생 원자력 발전소 공사 자재를 옮기기도 했고 방어진 수협에서 물 흐르는 수산물을 싣고 남해 통영 등으로 가져다 주기도 했다. 냄새가 지독한 화학 공단에서 숨을 참으며 짐을 부리고 어마어마하게 넓은 현대중공업, 포항제철, 거제 삼성중공업 공장 안에서 길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중소기업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나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얼마 전 온산 항 달포 부두에 페인트를 배송하는 일을 했는데 먼바다에 떠있는 큰 배로 작은 배가 옮겨 싣는 작업으로 대기 시간만 3시간이 걸려 밤 11시에 마치고 귀가하니 12시가 넘었다.
평소에는 대구나 구미, 부산이나 창원 그리고 진주나 통영, 거제까지 왕복 400km 정도를 운행한다. 전기차라서 충전 시간을 감안하면 하루 12시간 정도 운행하는 것 같다. ‘8시간 노동’은 자영업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현실이다. 오히려 힘든 점은 중개업자가 수수료를 10% 이하로 하면 다행인데 20%~30%로 너무 많이 떼이는 경우가 있어 힘이 빠진다. 정부가 나서서 공정한 요금을 설정하여 화물 운송 질서를 확립하는 일이 절실하다.
다만 멀리 벗어나고 싶을 때는 울진이나 상주, 영주, 거창, 함양 등 돌아올 때 빈 차로 올 각오를 하고, 경치 구경에 초점을 맞추어 외진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거창의 명승 수승대와 울진 오징어 풍물거리, 영주 분처바위 도마상 등 다양한 구경거리를 보며 다닌다.
▲ 멀리 벗어나고 싶을 때는 경치 구경을 목적으로 떠나기도 한다. 사진은 목포로 운송을 하러 갔을 때 © 정익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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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다
79학번으로 입학하여 그해 가을 박정희가 죽고 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도 나는 관심이 없었다. 학내에 사복 경찰이 진을 치고 구호를 외치는 학우를 끌고 가도 상관하지 않았다.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음악도로서 유학이나 서울로 대학원 진학만을 꿈꾸며 캠퍼스 커플로 대학 생활을 즐기기 바빴다.
졸업 후 안동에서 처음 교단에 서면서 학교 현실과 사회에 눈을 뜨게 되어 ‘YMCA 중등교육자 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게 되고 사학 비리와 교육 모순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85년 결혼 후, 아내가 있는 울산으로 학교를 옮겨 고 노옥희 교육감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운동에 뛰어들어 교사협의회를 만들고 86년 교육민주화 선언과 89년 전교조 결성으로 같은 학교에서 두 번이나 해직과 복직을 겪으며 파란만장한 교사 생활을 보냈다. 두 번의 해직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불평하지 않는 아내 덕분에 전교조 활동을 열심히 했고 해직된 후 동료들이 전임자로 투쟁할 때 아내의 성화로 어쩔 수 없이 피아노 학원 일을 도와야 했고 지금은 그 아내 덕분에 행복한 운전을 한다.
작년 가을 울산지부 참실 발표회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클래식>이라는 타이틀로 클래식 음악 감상을 진행하면서 계속 전교조와 끈을 이어가고 여러 시민단체 활동에 힘을 보태며 살아간다.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학생들과 같이 노래 부르는 일도 좋았고, 전교조 기치 아래 교육 운동에 매진한 것도 보람 있었고, 지금 운전대에 앉아 노래 부르며 운전하는 일도 즐겁고 행복하다.
운전하는 동안 FM 클래식 방송을 틀어놓고 교사 시절보다 더 많은 음악 감상을 즐기며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아리아 <네순도르마>를 따라 부르다가 고음에서 막혀 힘들어하기도 하고, 대중가요 <문어의 꿈>을 신나게 따라부르다가 박자를 놓치기도 하고, 행진곡이 나오면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 오늘도 트럭에 몸을 싣고,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나아간다. © 정익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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