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교사집회에 참가한 교사들 © 김상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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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오후, 고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소식은 교육계에 그저 소수가 겪는 불운한 이야기로 떠돌던 소문이 엄연한 현실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로 인한 슬픔과 분노의 에너지는 폭발적이었으며, 에너지는 모아져야 했고 방향이 있어야 했다.
초등교사들의 소통 플랫폼 인디스쿨에 공지된 게시글 하나로 시작된 7월 22일 1차 집회는 이런 요구에 대한 공감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후 총 8차의 전국교사집회가 열렸고, 집회와 이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국 교육계의 관습적인 집회 문화와 여론 수렴 방식의 지축을 뒤흔들고도 남을 큰 변혁이었다.
‘K-교사집회’라 칭해진 전국교사집회의 몇 가지 양상을 톺아보려 한다.
점들의 연대
집회의 주체가 노조나 단체가 아니라 ‘점들의 모임’이었다. 점을 모으는 데 있어 초등교사 온라인 플랫폼 '인디스쿨'이 큰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초등교사들만 이 집회를 끌어왔다고 할 수는없다. 5000명으로 시작된 집회 참여자 수는 점점 늘어나 7차 집회에 30만 명까지 이르게 된다. 교육부의 해직․파면이라는 중징계의 겁박이 있었던 8차 집회에서도 전국에서 12만 명이 참여하는 뜨거움을 보여주었다. 학교 급별, 직위, 현․퇴직을 가리지 않고 교직계가 일심단결하여 집회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집회 용어를 빌리자면 교실 속 외톨이였던 ‘점’들이 광장에 모여 ‘선’이 되고, ‘면’이 되어 함께 집회를 꾸린 것이다.
물론 소속 급별, 성별, 지역별, 연령별로 온도의 차이가 있었고 지체 현상도 벌어졌다. 인디스쿨을 중심으로 집회 논의가 이루어졌기에 유중등 교사는 정보 소외를 겪었고, 집회에 대한 초기 반응도 민원이 많은 서울․경기권의 젊은 여성 교사들에게서 더 뜨거웠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그 온도와 간극은 틈을 좁혀 갔다.
디지털 민주주의
온라인 플랫폼을 거점으로 시작된 집회는 이후 소통 역시 온라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집회 운영진을 모으고, 집회 내용을 선정하고, 그 결과를 배포하는 데 있어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와 카톡 오픈 채팅방, 패들렛, 노션 등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온라인 특성상 관련 정보는 순식간에 확산되고, 의견 또한 빠른 시간 내 수렴되었기에 1주일 단위로 수만 명이 열리는 집회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여름방학이라는 시기 특수성도 더해져 집중과 확산의 기세는 배가 되었다.
1500명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집회 관련 오픈채팅방은 수십 개가 만들어졌고, 여론 확산의 큰 공을 세웠다. 인디스쿨에 접근할 수 없는 유중등 교사도 오픈채팅방을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오픈채팅방 특성은 홀로 있던 ‘점’들이 쉽게 자신의 아픔과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모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1차 집회 이후 집회 운영진을 꾸리는 과정에서 보인 디지털 민주주의 과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실명, 소속 노조나 단체 등도 밝히지 않은 블라인드 채용 방식으로 집회 운영진이 꾸려지고, 발언자 선발도 공모를 통해 블라인드 방식으로 이루어져, 내용만 보고 발언자가 선발되었다.
1차 집회를 처음 주도한 인디스쿨 닉네임 ‘굳잡맨’은 1차 집회 이후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추모집회를 이끈 리더로 주목 받았다. 그러나 ‘공교육 멈춤의 날’을 하루 앞둔 9월 3일 ‘교육부와 현장교사와의 토론회’에 6명의 현장교사 중 한 명으로 참가하겠다고 밝히자, 인디스쿨을 비롯한 각종 오픈채팅방에서는 토론회 시기와 취지도 옳지 않으며, 대중이 부여하지 않은 대표자격을 스스로 챙겼다며 큰 비난을 했다. 공은 인정하되, “점으로 사라지겠다는 약속을 지켜라”는 여론에 불이 붙었다.
이렇듯 집회 개최 전후로 ‘점’들은 각자 1/N만큼의 권리와 권한을 부여받아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한 후, 사라지고 다시 모이길 반복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날 때는 가차 없는 비난을 쏟아내는 디지털 민주주의를 보여주었다.
헌신과 연대
8차까지 진행된 집회를 추진하는 힘은 헌신에서 나왔다. 헌신의 영역은 다양했다. 재정, 재능, 시간 등등 각자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영역을 맡아 기민하게 움직였다.
집회 운영비(방송장비, 피켓 등)와 지역에서 올라오는 전세버스비 등 집회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자발적 후원금으로 충당되었다. 회당 5000만 원~4억 원 가까이 이르는 운영비는 후원 계좌를 열고 며칠 내로 걷어졌다. 집회에 꼭 필요한 만큼만 걷고, 잉여액이 발생하면 다음 집회 운영비로 이월되었다. 8차 집회가 끝난 이후에도 교권 홍보를 위한 버스 광고비를 모으는 공지가 올라오자 1억 6천만 원이 모여 그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후원자 다수는 교사였지만, 교감․교장, 수석교사, 퇴직교사, 전문직 등 교육계를 총망라하는 다양한 개인과 단체들이 후원에 참여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교육계가 화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헌신과 더불어 재능과 시간의 헌신도 돋보였다. 인디스쿨 정책TF팀에서 만든 300페이지에 가까운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교사들의 헌신은 교육정책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매회 집회운영팀은 물론이고 지역버스 인솔자들의 헌신도 회자되고 있다. 인솔자들은 버스를 타는 토요일뿐 아니라 버스 탑승 교사들을 모으고, 개별적 특이사항도 챙기며 연락하기 위해 평일도 꼬박 시간을 투자했어야 했다.
집단 행동
서이초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서이초 앞은 근조 화환들이 길게 학교 담장을 따라 세워졌다. 교문 앞과 게시판에는 추모의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붙였다. 근조 화환과 포스트잇은 이후 호원초, 신목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교사들의 카톡 프로필도 검은 리본의 물결이었다. 교사들은 지인 대부분이 교사들인지라 카톡 프로필 사진만으로 누구인지 구별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8차 추모집회 이후 교육권 확보 입법 촉구 과정에서도 교육위 국회의원들에게 입법 촉구 문자 보내기, 국민청원 입법 동의하기 등 다양한 집단 행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행해지고 있다.
멈춤 후 새로운 출발
고립되어 있던 교사들이 잠시 광장에 머물렀던 기억만 안고 다시 교실 속 외톨이 점이 될지가 8차 집회 이후 교사들의 고민으로 보인다. 집회 후 교사들은 학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관리자, 교육청, 교육부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묻고 있고, 왜 교사들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 한 채 수십 년간 숨죽여 지냈는가 하며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8차 집회 이후 ‘노조 가입하기’ 운동이 벌어지고, ‘교사의 정치기본권’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정치’, ‘탈노조’를 외쳤던 집회 이후 나온 정치적 요구이다.
이제 슬픔과 추모, 분노의 여름을 지나와 가을 앞에 서 있다.
9월 16일부터 다시 시작될 집회는 8차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 떠나는 첫 집회가 될 것이고 그 자리엔 언제나 그랬듯 전교조가 제 역할을 하며 함께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