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고 나서니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다정한 인사처럼 들려온다. 오늘은 어떤 꽃이 얼마나 더 벙그러졌을까, 오늘은 자작나무의 잎이 얼마나 더 자랐을까, 어제 옮겨심은 꽃백일홍은 뿌리를 잘 내렸을까를 살펴보는 일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보다 안젤라 장미가 세 송이 더 피어났고, 삼색 핑크빛 겹찔레는 어제보다 세 가지 색깔이 좀 더 선명해졌다. 작약은 벌써 꽃잎이 지고 씨앗을 품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삽목을 해서 키운 붉은 인동초는 체리나무를 감아 오르면서 들큰하고 은근한 향기를 뿜어낸다.
▲ 아내는 벌써 일어나 마당 아래 꽃밭에 나가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 © 이동백 퇴직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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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1년 먼저 명예퇴직을 한 아내는 벌써 일어나 마당 아래 꽃밭에 나가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 아내의 뒤를 이어 나도 올해 2월, 정년을 2년 남기고 명예퇴직을 했다. 아내가 먼저 퇴직을 하고서 마당 앞에 큰 꽃밭을 일구어 놓았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아내의 꽃밭 일을 거드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로 힘쓰는 일과 목공일이다.
며칠 전에는 방부목을 한 아름 사다가 장미가 타고 올라갈 장미 아치를 만들었다. 다행히도 몇 년 전에 목공을 배워 둔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게 될 줄 몰랐다. 더욱이 아는 분이 주신 중고 원형 톱이 있어서 나무를 자르는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니 아치 만드는 일의 절반은 거저되는 것 같다. 오벨리스크 모양의 아치, 직사각형 모양의 아치, 지붕이 있는 사다리 모양의 아치, 격자무늬가 있는 울타리 모양의 아치 등 다양한 아치를 만들었다. 처음 만드는 것들이라 서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지 않고 간격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완성도는 엉성하지만 직접 만들었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한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것보다 만드는 과정은 험난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내가 만족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 방부목을 한 아름 사다가 장미가 타고 올라갈 장미 아치를 만들었다. ©이동백 퇴직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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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겨울의 매서움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복수초가 노랗게 피기 시작하면 우리 가재골의 꽃밭 일은 시작된다. 가재골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도랑에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가재골. 그 가재골에 터를 잡은 지 벌써 11년째다. 사람들은 퇴직하고 여행이나 하면서 편히 지내지 왜 이리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는다. 사실 퇴직을 하고 나니 일정한 공적 업무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좋았지만 한편으론 어떤 책임질 일로부터 모두 벗어나 있다는 상실감도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실감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꽃밭에서의 노동이다. 풀을 베거나 나뭇가지를 자르거나 흙을 열심히 퍼 나르는 일, 호스를 잡고 1시간 넘게 물을 주는 일 등은 육체적으로는 고된 일이지만 다른 생각을 없애주는 데는 아주 그만이다. 일의 삼매경에 빠진다고나 할까. 자발적 노동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노동을 자기가 즐거워서 하면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할 때 나오는 호르몬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좋아하는 꽃을 구해다가 심고, 좋아하는 나무를 한 그루 심을 때마다 마음이 자꾸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다. 매일매일 변하는 꽃과 나무들의 변화가 미세하게 느껴진다. 어제의 나뭇잎 색깔과 오늘의 나뭇잎 색깔이 다르고 어제의 바람과 오늘의 바람결이 다르다. 이렇게 자연을 느끼는 일 속에서 오롯이 자연 속에 빠져든다.
얼마 전에는 정말 심고 싶은 나무를 여기저기 다 수소문해 보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사람이 인터넷 상에 소나무 묘목을 판다고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 소나무 뒤 배경에 우리가 사고 싶은 나무가 찍혀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소나무 대신에 그 나무를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 나무도 팔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나무를 파는 조건은 우리가 직접 나무를 캐가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나무를 캘 때 나무 분을 어떻게 뜨는지 동영상을 보아가면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트럭을 빌려 타고 달려가 난생 처음 나무 분을 떴다.
다행히도 그 나무를 파는 분이 나무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이라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무 분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끈을 이용해서 차로 들어 올리는 것도 그분이 알려준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태산목이라는 나무가 우리 꽃밭에 심겨지게 되었고, 지금은 뿌리를 잘 내리고 꽃봉오리도 여러 개 맺고 있다. 태산목의 꽃은 크기도 크고 향기도 좋다고 하는데, 정말 기다려지고 기대가 되는 꽃이다.
꽃이나 나무를 심고 기르며 산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의 연속이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즐겁냐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만족할 답변을 찾지는 못하겠다. 내 몸 안에 식물과 교감하고 싶은 호르몬이 흐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늘도 우리 부부는 저녁 밥상에서 새로 핀 흰색 아이리스를 이야기하고 낮에 다녀온 누구네 꽃밭을 이야기한다. 세상사는 속 시끄러운 이야기 말고, 이런 대화가 밥상머리에서 오간다면 그럭저럭 살만한 삶이 아니겠는가?
▲ 저녁 밥상에서 새로 핀 흰색 아이리스를 이야기하는 그럭저럭 살만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동백 퇴직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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