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업식 날, 정채봉의 <첫 마음>을 칠판 가득 쓰고 반 학생들과 함께 낭송한다. © 최종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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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는 말을 남겼다. 그만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는 힘이 있다. 바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세상을 들여다보며 다른 존재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말에 담긴 에너지는 마음으로부터 뻗어 나와 다른 이의 안에 가 닿고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듣고 말하고 읽고 씀으로써 ‘나’는 자기 안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가 될 수 있고 마침내 세상과 만난다. 생활교육의 중심에 ‘말과 글’을 두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학급에서의 생활교육은 3월 2일, 시업식 날 새로운 담임 반의 담임과 학생으로 만나면서 시작된다.
첫날은 우선, 시를 한 편 준비한다. 담임 시간을 맞이하기 전, 일찍 출근해 정채봉의 <첫 마음>을 칠판 가득, 단을 나눠 적어둔다. 0학년 0반으로 일 년간 함께하게 된 것을 환영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을 담은 시를 다 같이 낭송하자고 제안한다. 나눠준 활동지의 “날마다 새로우며 넓어지며 깊어진다”라는 마지막 구절을 함께 읽고 나서는 새 학년을 시작하는 마음이 어떤지 생각해보도록 한다. 덧붙여 올해가 어떤 해가 되었으면 하는지, 그러기 위해 자신이 학교생활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토의하는 시간을 가진다. 활동지에 각자 생각을 적고 짝과 얘기를 거쳐 모둠에서 이야기한 것을 함께 공유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바라는 학급의 모습이 대략 윤곽을 드러낸다. 담임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 더 좋다. 학생들과 공유한 각자의 시작하는 마음을 갈무리했다가 교실 뒤판이나 앞판에 게시해두면 환경미화로도 보기 좋고, 무엇보다 학급 공동체가 공유하는 학급에 대한 상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역발상으로 접근하는 학급약속 © 최종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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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더해 학급 약속을 만들 때는 역발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우리 0학년 0반이 최악의 학급이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같은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앞다투어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 행동들을 쏟아낸다. 서로 싸우기, 믿지 않기, 의견을 존중하지 않기, 선생님과 소통하지 않기, 오해하기, 경쟁심 때문에 화내기 같은 일련의 목록을 만들고 나면 앞으로 두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먼저 “서로 싸우지 않기.”처럼 문제 행동을 “~하지 않기”의 형태로 바꿔본다. 이걸로도 충분하긴 하지만 이왕이면 ‘하지 말기’보다는 ‘하기’ 같은 긍정 표현 쪽이 좀 더 좋다. 예를 들어 학급 약속을 정했다고 만사가 잘 굴러갈 리 없다. 적어도 월에 한번, 가능하다면 격주로 시간을 내어 학급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운영하는 게 좋을지 점검해야 한다. ‘라떼는’ 주마다 돌아오는 HR 시간을 활용할 수 있어 좋았지만, 지금은 자율 시간에 해야 할 교육들이 넘쳐나는 통에 학급 회의가 곁방살이 신세다. 그래도 운용의 묘를 발휘하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학급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살피고 더 나은 모습을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에 관한 지혜를 모을 수 있다.
급훈을 정할 때는 교사의 교육철학을 강조한다. 단어 자체에 ‘가르친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냐며 짐짓 자신을 변호해본다. 꾸준히 사용하고 있는 급훈은 바로 ‘그럴 수도 있지’이다. 무책임이나 자기합리화로 흐르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겠지만, 학생들과 생활하다 보면 유난히 걱정되는 부분이 바로 회복 탄력성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크고 작은 시련이나 역경,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아픔을 항상 피해 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그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고 대응하게 하는가는 같은 경험이더라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회복 탄력성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가혹하게 굴기 쉽고 부정적인 정서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기 쉽다. 그래서야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다.
▲ '그럴 수도 있지' 급훈 액자 © 최종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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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학생들에게 ‘그럴 수도 있지’를 제시하고 그 뜻을 풀이한다. 뜻을 풀이할 때는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 가사를 인용한다.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실수투성이이고 외로운 나를 봐.” 자신과 동료의 실수를 관대하게 눈감아주고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지레 움츠러들지는 말자는 이야기를 하기 전, ‘내가 살면서 실수한 일과 그때의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면 보통 부끄러움, 화남 등 좌절된 감정이 주를 이룬다. 이때 주위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다면 그런 속상함을 최소화하고 실패 경험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어가면 교실의 집중도가 한껏 올라간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그럴 수도 있지’를 적용하지는 않는다. 학생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부분이지만, 폭력 등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에서까지 사용하는 말은 아니며, 나와 친구의 새로운 도전을 격려해주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부연한다. 급훈을 핑계 삼아 자기 마음대로 굴면서 정당화하는 학생이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급훈이 그저 교실 벽에 걸린 액자 속 글귀로 남지 않도록 교사부터 솔선하여 학생들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는 자연스럽게 교실 속에 녹아든다. 활동지를 뒤로 넘기다가 흘렸을 때, 물건을 전해주려다 다른 친구를 맞혔을 때와 같이 교실에서는 소소한 실수가 늘 함께한다. 이때 실수한 사람을 야유하지 않고 급훈을 외치는 교실 문화가 생기면 자칫 감정이 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긴장이 낮아지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첫 만남과 학급 약속, 급훈을 통한 생활교육의 한 모습을 짚어보았다. 학생들의 인지적 성장뿐 아니라 정서적 성장이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한 타인과의 관계 형성, 갈등 조정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끌고 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학생들에게 적절한 본보기를 제공할 수는 있다. 또한 지시나 제시에 그치지 않고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말과 글을 통해 지속적인 자극을 제공한다면, 학생들에게 유의미한 타자로서 담임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