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mb때 이주호?"
10월 28일 이주호 교육부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이주호’란 이름이 언론에 등장하면서 “뭐? Mb때 이주호?”하며 불안한 눈빛과 한숨소리로 교사들은 수런거렸다. 그가 밀어붙였던 정책들이 학교 안에서 어떤 지옥도를 만들어냈는지 각자의 경험 안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로 인해 교사들은 훨씬 꼴사납게 싸워댔다.
나 역시 이주호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소주 2병에 밤샘 수다를 가능케 한다. 몇 가지를 얘기하자면 우선 그로 인해 교사들은 그전보다 훨씬 꼴사납게 싸워댔다. 이주호는 성과급 지급 차등비율을 20%에서 최소 50%로 확대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교사 공동체성은 돈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그전까지는 성과급을 월급 또는 수당이라 생각하고 호봉제로 받거나 등급을 돌아가면서 받자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급 차등률이 오르니 정년이 가까워져오는 선생님은 "내가 S등급 못 받아서 돈 덜 받게 되면 네가 책임질거냐"고 호통을 쳤다. 나는 장관의 영특함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하면 눈 옆을 가린 채 달리게 만들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자였다.
그 이후로 성과급을 둘러싼 유구한 진흙탕 싸움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 싸움의 진정한 비극은 아이들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 더더욱 의미 없어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교사들은 성과급에 반영하는 수치가 되어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성과급 차등지급률이 상향된 이후 교사들은 각자 교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성과급 산정 시기에 제출할 연수시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수업과는 관련 없지만 성과급에 좋은 점수를 받게 할 업무에 매달렸다. 다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보통은 허허롭다가 어떤 순간이 오면 꼴사납게 싸워야 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급격히 사라졌다.
또 그로 인해 교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급격히 사라졌다. 이주호 장관은 소위 일제고사라 불리는 전국단위 성취도 평가를 도입했다. 그리고 학교 성적을 공개했다. 미도달 학생 수를 그가 도입한 학교 평가에 반영했다. 학교별 미도달 인원은 교장의 면을 세우거나 깎아내리는 일이었고 교장의 다음 행보에 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염치가 있던 우리학교 교장은 학기 초 6학년 교사를 불러모아 자기 교장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미도달 많이 나오면 어려워진다며 최선을 다해줄 것을 읍소했다) 교장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미도달 학생을 줄일 것을 명했다.
성취도평가의 광풍이 극에 달했던 그해 나는 우리 반 6학년 아이들에게 내가 고등학교 내내 당했던 것을 골고루 하는 교사가 되어 있었다. 성취도 평가는 지극히도 문제풀이 훈련이었기에 교과서 진도를 1.5배속으로 뺐다. (아이러니하다. 미도달을 줄여야 한다면서 느린 학습자에 대한 배려는 일도 없는 방식으로 미도달을 줄이느라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성취도 평가와 관련 없는 교과(음악, 미술 ,체육 등)는 수업 연구는커녕 문제풀이 시간으로 쓰기 일쑤였다. 미도달이 될 만한 아이들은 남겨서 그날 틀린 문제를 다시 풀게 했다. 나는 어느날 틀린 문제를 또 틀리고 또 틀리는 그 아이에게 “이해하려고 하지마. 그냥 외워!”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성취도 평가를 끝내고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운동장에서 물총을 쏘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벅차오르는 숨을 내뱉으며 웃고 있었고 나는 뒤돌아 울었다. 아이들의 성장에 잘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과 자부심이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 저녁 뉴스에는 연일 초등학생들의 무자비한 학교 폭력사건이 등장했다. 난 어른들이 몰아붙인 경쟁교육의 끔찍한 부작용이라 받아들였다. 할 말이 없었다.
그 밖에도 교원평가 전면 시행(성과급으로 성이 안 찼는지 교원평가로 부적격 교원을 걸러낸다며 교사 품평 시스템 적용을 모든 학교로 확대했다. 품평은 교사에게 좋은 자극을 주지도 못했고 부적격 교원을 걸러내지 못했다.), 학교폭력 징계사항 학교생활기록부 기재(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이 생기부 불이익 주기였다. 결국,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교사들을 끝없는 송사에 휘말리고 있다.),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로 자사고 확대 등등.(사교육 없이 특목고, 자사고 갈 수 있는 정책이라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혀 아니었다는 건 설명이 필요한가?)
무엇보다 기가 막힌 기억은 엄마처럼 안 살려고 공부한다는 아이
여러모로 기가 막히지만 사실 나에게 가장 기막힌 기억은 그 시절 그 아이의 이야기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제법 잘하던 아이였는데 도통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 공부 열심히 하잖아. 왜 해?” 아이는 답했다. “엄마가 하라고 해서요.” 나는 또 물었다. “엄마는 네가 왜 공부하길 원하셔?” 아이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공부 안 하면 엄마처럼 산다구요. 엄마처럼 살기 싫으면 공부하래요.” 물론 이런 말을 듣는 아이들은 몇 십년 전 내가 어렸을 때도 있었고(나 역시 들어봤으니) mb정권 때도 있었고 2022년 현재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주호 장관 치하에서 이런 말을 들은 나는 더 깊이 좌절했다. 세상이 이런 식이라면 소중한 자식 앞에서 자기 노동을 부끄러워하며 자기 삶을 부정하는 부모는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말했다. “난 엄마 좋은데... 엄마는 엄마가 싫은가 봐요.” 나는 웃지 않은 그 아이가 왜 웃을 수 없는지 이해했다.
웃음소리를 죽인 책임을 묻는 청문회가 되어야
오늘 아침 눈떠서 만난 기사 제목이다. “이주호가 세운 단체 사교육 업체 스폰 논란, 청문회 넘을까” 부제 “평소 AI 사교육 적극 수용 발언, 에듀테크 기업서 1·2억원 받아” (10월 25일 국민일보 기사) 학원비를 벌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무리하게 일했던 어머니. “너는 엄마처럼 살면 안 되니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말했던 어머니. 돌아보니 어머니를 그렇게 살게 만든 책임은 바로 우리 사회에 있다. 이주호 후보 청문회는 아이들과 학부모의 웃음소리를 죽인 책임을 묻는 청문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산을 넘는 게 절대 수월하지 않아야 함이 마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