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 후 결심한 제주 한달 걷기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하던 때다. 명퇴 후 마침 기회가 되어 한 달을 살아보기로 마음먹고 검색을 시작했다. 올레길을 걷고 싶었던 옛 생각이 났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보니 동쪽에서 보름, 서쪽에서 보름을 살아야 수월한데 숙소를 이동해야 하고 아침마다 밥을 하다보면 피곤해서 남편과 다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 식사, 숙소, 차량 등을 제공해주는 올레길 걷기 여행 홈피를 발견했고 돈을 조금 더 내도 여기가 좋겠다는 생각에 옷, 신발 등 기본 짐만 챙겨 제주도로 떠났다. 한달 걷기 중 좋은 추억 몇가지를 짧게 소개한다.
서귀포의 시작인 올레 1코스. 보통 성산의 정면만 보고 가는데 걸으면서 성산의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우도와 성산의 아름다운 전경에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른쪽 성산에 있는 큰 동굴은 일본의 카미카제를 떠올리게 했다. “성산, 너도 참 많이 아팠겠다.”라는 말로 위로해 주고 싶었다. 광치기 해변 쪽에는 서북청년 특별중대와 학살 현장인 터진목 4.3 유적지가 있다. 과거 온통 피로 물들었을 검은 모래사장. 아름답다고만 생각한 제주에 감추어진 슬픈 학살 현장에서 고개 숙이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였다.
올레 10코스. 송악산 전경에 감탄하며 걷다보면 한국군이 주민을 학살한 섯알오름 양민학살 터, 4.3 희생자 추모비, 알뜨르비행장 등을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평화가 더 중요해! ”라고 느낄 수 있는 다크투어리즘 걷기. 제주의 이면을 보다보면 제주를 더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올레 11코스 중 모슬봉 둘레. 무덤 둘레가 돌담으로 되어 있다. 집 주변 밭에 무덤이 있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무섭다는 생각보다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좀 숙연해지는 곳이었다.
올레 12코스 중 지질공원이라 할 만큼 장관을 이루는 엉알길을 지나 당산봉을 향해 힘들게 올라가면 차귀도가 보인다.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와는 다르게 색다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신기했다. 다음에는 천천히 음미하며 이 길을 느긋하게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걷기 여행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시간이었다.
올레 16코스 중 신평 곶자왈에 들어서면 마치 밀림 속에 있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름 모를 나무와 풀꽃, 다양한 새소리 그리고 맑은 공기의 자연. 마치 내가 비밀의 숲속에 있다고 느껴져 추억의 한 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그렇게 산길, 밭길, 해안 길을 걸으며 가파른 지미봉 봉우리를 약 20분 올라가면 확 트인 정상에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조망이 360º 가능하여 우도, 종달 포구, 성산 일출봉, 두산봉, 수많은 오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멋진 전경이 눈에 들어와 힘들었던 마음이 싹 가시고 기분도 좋아졌다. 이 길이 올레길 마지막 21코스인 이유를 이해했다.
발로 걸으면 더 보이고 더 느낀다
제주의 정감 어린 돌, 울타리와 돌담, 바람, 이름 모를 꽃과 나무, 풀을 피부로, 마음으로 느끼며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자연과 교감하는 내가 사랑스러워지는 걷기였다. 각각의 코스마다 자신의 색깔과 매력을 내뿜고 있기에 제주에 와서 관광지만 보고 발길을 돌린 과거의 나를 돌아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 대신 “발로 걸으면 더 보이고 더 느낀다.”라는 말로 바꾸고 싶어지는 올레길 걷기.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였던 제주 주조 공장 옛터와 곤을동 4.3 유적지 등 제주의 아름다움 뒤에는 4.3의 학살 현장들이 있다. 3코스에서 탄성을 지르며 맨발로 걸었던 모래사장과 저녁이 되면 물이 차서 호수가 되는 아름다운 표선해수욕장이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피로 물든 제주, 아픔을 품고 있는 제주민들이 더 아름답고 넉넉하게 느껴졌다.
전교조 밖에 몰랐던 삶,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올레걷기
425km 올레길을 완주하며 나는 몸무게가 5Kg 줄어 날씬하고 가벼워졌다. 골다공증이 있어도 운동을 싫어하는 나를 매일 만 보 이상 걷게해준 올레길이다. 걸어야 더 느끼고 더 볼 수 있다는 깨달음과 제주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한 올레길 걷기는 내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래서 올레길이 계속 보존될 수 있도록 작은 후원을 하며 제주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느 가을날 다시 올레길을 걸어 볼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87년 9월 발령 후 88년 교사협의회부터 명예퇴직까지 전교조밖에 몰랐던 삶이었다. 제주에서 걸으며 신념을 지키며 우직하게 사는 삶만이 아니라 유연한 삶도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인생 2막을 향해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한 개씩 해보는 중이다. 삶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할때. 여러분에게 한 번쯤 올레길 걷기와 완주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