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교육 OUT?
선거와 함께 등장한 괴이한 문구를 보면서, 이러한 구호를 외치는 자가 '보수'를 자칭하는 모습에 착잡한 마음이 가득하다. 대체 보수란 무엇인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자는 것이 보수 아닌가. 우리가 교육에서 지켜야 할 가치는 너무나 명확하다. 공평, 정의, 행복, 민주적인 태도 등등. 그런데 이런 가치를 추구하고 만들어온 조직이 바로 저 '자칭보수'들이 비난하는 전교조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나는 전교조 조합원이다.”
내가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느끼는 이 자부심은 사실 그리 대단한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는 89년 당시 그저 중학생이었을 뿐이었고, 서슬 퍼런 탄압과 맞서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내게 전교조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쓰디쓴 경험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반드시 선택해야 할 대안이었고, 지금의 학교 현장을 변화시켜 온 커다란 동력이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와 전교조'라는 글을 통해 내가 왜 전교조에 가입했고 활동을 하는지를 좀 정리해두고 싶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을 안팎으로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의 희망이 여기에 있노라고. 그래서 애정을 가지고 남아있노라고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좀 호소하고 싶다.
통장에 60원만 들어있던 나
1980년대 초반 초등학교 시절, 당시엔 국민 학교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지만, 분위기는 박정희 때의 그것이 여전히 남아있어 오후 6시가 되면 동네의 통장 집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새마을 풍의 건전가요가 휴일 오전에 흘러나왔었는데. 이 때는 위정자들이 절약과 저축을 최고의 가치로 국민들에게 주입했고, 당연히 학교에서도 전교생에게 통장을 만들어 주면서 6년 동안 저축을 장려했다. 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새마을 금고 부스가 있었고, 여기에 여직원이 상주하면서 일과시간 동안 학생들이 저축하는 돈을 수납하고 통장에 기록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 친구들은, 아니 정확히는 그 친구들의 부모님은 6년 동안 여기에 참 열심히도 돈을 모으셨다. 그 돈으로 중학교 갈 때 등록금이나 필요한 책 등을 마련하기 위해서. 당시는 이자율도 높은 편이라 저축은 재산을 늘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당장 먹고 쓰는 돈도 넉넉지 않았던 터라 [저축]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고, 당연히 내 통장 페이지는 6년 동안 딱 한 건의 입금 기록 이외에는 잉크 자국 없이 깨끗할 수 밖에 없었다.
통장에 찍힌 딱 한 건의 입금 기록. 60원 입금. 1학년 소풍을 갔다 오고 남은 교통비. 80년대 초의 소풍은 아침에 담임선생님의 인솔 하에 소풍 장소 이동, 점심때 부모님이 소풍장소로 오시면 부모님과 점심 먹고 개별하교 이런 식이었다. 왕복 교통비 120원을 걷었는데 돌아오는 교통비 60원이 남게 되었고 이것을 담임 선생님이 일일이 계수해서 반환하기 힘드니 반 아이들 통장에 한꺼번에 넣어준 것. 이 통장은 이제 뒤에 나오는 이야기의 중요한 복선이 된다.
6학년 졸업식. 내가 저축상이라고?
초등학교 때 나는 공부를 좀 잘 했다. 성품 자체가 권위에 순종적인 면도 있었고, 또 완벽 기질도 있었기에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그저 열심히 듣고 필기하고 외웠다. 당시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시험을 보던 때였고, 나는 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는데 항상 실기평가에 있어서는 학교에 영향력 있는 분들의 자제들에게 밀리곤 했었다.
하지만 6학년 때 선생님은 달랐다. 술 좋아하시고, 전날 숙취로 교실에서 주무시는 일이 태반이었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어설픈 몸동작으로 우리들과 함께 축구를 해 주시던 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재력으로 우리들을 판단하지 않았다. 평가는 늘 공정했고 나는 실기평가에 있어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승진과 거리가 멀었다.)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축하한다. 네가 올 해 6학년 전체에서 가장 성적이 좋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보통의 경우 가난한 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애어른으로서의 삶을 강요받게 된다.)
“그래서 네가 이번 졸업식에서 1등 상을 받을거야. 정말 자랑스럽다.”
당시 초등학교에서 외부 상장은 오직 졸업할 때 한 번 받을 수 있었다. 외부 상 중에 가장 높은 등위의 상이 '구청장상'이었고, 이것은 학년 전체 성적 1등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등상장 같은 것. 1년 터울의 누나도 졸업식 때 이 상장을 받았는데 600명의 졸업생들 앞에서 상을 받는 그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도 그 상장을 받는다니.
졸업식 전날이었다. 스피커로 몇몇의 이름이 호명되었는데 내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빨리 교장실로 오라고.
“상장을 졸업식때 안주고 오늘 미리 줄 모양이구나. 얼른 가서 받아와라. 다시 한 번 축하한다.”
상을 준다고 부르는 거지만 어린 마음에도 뭔가 좀 찜찜한 게 있었다.
‘사실 이런 상은 여러 사람 보는 데서 주는 게 더 좋은 것 아닌가. 좀 아쉽네. ’
어쨌든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뒤로 하고 얼른 교장실로 뛰어갔다.
교장실에는 졸업식때 상을 받을 몇몇의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성동구청장상!”
당연히 내가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 나를 안 주고 다른 사람을 준다. 우리 반은 아니라서 이름도 잘 모르지만 익히 아는 얼굴이다. 이 금호동 판자촌에서 가장 큰,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예쁜 정원이 있는 집. 길까지 뻗은 큰 감나무가 있고, 스텔라 자동차를 마당에 주차하는 2층 양옥집 녀석. 우리 동네 유지의 아들.
‘에휴, 우리 선생님 또 술드시고 제대로 명단 확인 안 했구먼.’
약간 실망은 되었지만 뭐 내가 1등이 아니었나보다하고 생각했다. 그 상을 받은 놈도 공부를 그럭저럭 하니까. 하지만 이후 저축상 수상자가 호명되었는데,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저축상이라고? 내가? 통장에 60원뿐인 내가?’
“위 어린이는 저축을 생활화함으로써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되므로... ”
난 그 때 확실히 알았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물론 그 이전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가난을 겪는 아이들은 자본주의의 험악함을 비교적 빨리 인지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내가 실력으로 증명해도, 세상은 결국 가진 자의 편이라는 것을.
"미안하다... 경종아..."
차라리 다른 상이었다면 난 그냥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저 내 실력이 부족했겠거니 하고.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저축상은 너무나 명백한 증거였다. 당시 선생님들도 참 그렇다. 최소한 저축상을 주려면 통장 내역 정도는 확인해야하는 것 아닌가. 받는 사람도 납득 못하는 이것을 상이라고 주는가. 그저 힘없고 가난한 집의 아이이기 때문에 양옥집 녀석에게 상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건가. 말할 수 없는 착잡함과 모멸감이 밀려들었던 내 13세의 겨울은 몹시도 시렸다. 받아 온 상장을 담임선생님께 슥 내밀어보였다.
“선생님, 저한테 저축상을 주던데요?”
순간 나는 읽었다. 담임 선생님의 눈빛을. 미안함과 분노, 절망이 뒤섞였던 그 복잡미묘한 표정을.
“어, 경종아... 그게.... 어... 정말 미안하다.”
“아니에요. 명단을 잘못 보실 수도 있죠. 어쨌든 그래도 졸업상하나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꼭 참았다. 담임 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내가 울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순간, 더욱더 비참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집에 와서 그 상장을 보여드렸더니 부모님은 실력이 부족해서 1등 상을 받지 못한거니 더 열심히 하라며 상장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셨다. 하지만 나는 그 상장을 다시 집어들어 내 책꽂이에 고이 챙겨 넣었다. 지금의 이 마음, 이 굴욕감, 이 슬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적어도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아픔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래서 나는 전교조에 가입했다. 그리고 꿈꾼다.
난 그래서 전교조에 가입했다. 아이들의 순수한 꿈을 어른들의 욕망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관리자의 비리를 막고 학교의 재정이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사용될 수 있도록. 모두가 부정을 저지르고 또 그것에 눈 감아 왔던 그 때 폭압에 맞서 당당하게 정의를 외치고 부조리를 감시했던 그 전교조에. 과거 용공사상으로 낙인찍혔던 학생 존중과 민주교육이 이제는 교육계의 ‘상식’으로 자리 잡도록 눈물로 씨앗을 뿌려온 바로 그 전교조에. 비록 작금에 이르러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안팎으로 비판을 받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대안은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꾸준히 조합비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내 인생을 돌아보며, 또 전교조가 걸어온 길을 톺아보며,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한 교육현장의 민주화와 교육을 통해 만들어 갈 더불어 사는 세상을 다시 한 번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