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칼럼] 반성적 사유 독촉하는 우리의 거울

이송희일·영화감독 | 기사입력 2022/04/23 [13:42]
오피니언
희망칼럼
[희망칼럼] 반성적 사유 독촉하는 우리의 거울
이송희일·영화감독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사입력: 2022/04/23 [13:42]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믿었던 괴벨스는 1927년 <공격>이라는 주간지를 창간했다. 반유대주의 언론. 독일 국민의 고통을 야기하는 게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나치당 선전책임자가 된 후에는 아예 일간지로 전환하고 증오를 위한 선전 무기로 사용했다. 

 

 히틀러와 나치는 몰락했지만, 여전히 분노와 증오를 대중 동원 수단으로 삼는 극우 정치가 도처에 번성하고 있다. 난민 증오를 앞세운 서유럽 극우, 여성과 성소수자를 낙인화한 동유럽 극우 정부들, 또 이주민을 주적으로 삼았다가 최근에는 무려 130여 개의 반성소수자 법안을 난사하는 미국 극우들. 경계선 바깥의 저 오염된 존재들이 '전통적 가치'와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선동이 대중의 열광을 얻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준석이라는 기표는 꽤 징후적이다. 지난 세월 분단 모순 하에서 위용을 떨쳤던 색깔론이 희석되자 새로운 주적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던 한국 우익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언어를 제공하는 것처럼 비춰지며 단숨에 공당의 스피커를 거머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 대선에서 개진했던 '여성 혐오'일 것이다. 페미니즘에 혐오를 투사하며 여성들을 고립시키고 포위하는 전략. 이준석이 한 거라곤 페미니스트들과 나머지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그저 조롱과 혐오의 말을 투척하는 거였다. 

 

 그 전략은 꽤 주효한 듯 보였지만, 막상 2030 여성 유권자들이 무섭게 결집하면서 싱거운 말풍선으로 그치고 말았다. 완연한 실패였다. 초조해진 그가 다음 표적으로 찍은 게 바로 '장애인 시위'다. 이번에도 경계선을 그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비장애인 사이를 갈라치고, '비문명적 시위', '볼모', '비정상적' 같은 표현들로 비하했다. 장애인을 고립시켜 다수의 지지를 자신의 등에 업기 위해서.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의 기미다. 

 

 시민들이 이준석의 혐오 발언을 앞다퉈 비판했고, 밤새 전장연 계좌에 연대의 후원금을 쏟아냈다. 다른 장애인 단체들이 이준석을 비판하는가 하면, 국힘당 내부에서도 쓴소리가 흘러나왔다. 국민의 55.9%가 이준석 발언에 반대하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상황이 이런데도 계속 말꼬리를 이어 붙이는 처지가 궁색하다 못해 애잔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그는 또 다른 표적으로 이동할 것이다. 만만한 소수자들을 고립시키고 다수의 지지를 게걸스럽게 움켜쥐는 게 그가 고집해온 공리주의의 비루한 운명이다. 그에게 정치란 시험 성적에 가깝다. 성적만 좋다면,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정의와 평등은 아무래도 좋다. 어쩌면 불평등과 차별에 눈 감고 능력주의에만 목을 매온 한국형 신자유주의가 낳은 아이콘, 그게 이준석일 것이다. 다수의 행복과 성장이라는 공허한 레토릭을 앞세워 지난 세월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농민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평등을 지겹게 나중으로 유예해오지 않았던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반성적 사유를 독촉하는 우리의 거울이기도 하다. 차별과 고립을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이 바로 연대라는 걸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어깨의 연대로 공공성과 사회를 구성해야 고립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깨달음 말이다. 이준석의 여성-장애인 혐오를 경유하며, 외려 우리는 백래시에 대한 반격의 열쇠를 쥐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뭉치면 이긴다. 

 

이 기사 좋아요
ⓒ 교육희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PHOTO News
메인사진
[안녕하세요 선생님] 나는 누구인가
메인사진
[교실찰칵] 잊지말자! 경술국치일
메인사진
[교실찰칵] 교실의 변신은 무죄
메인사진
[만평] 역지사지
메인사진
[만화] 안녕하세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