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속 페미니즘] 다른 존재를 위해 넓게 마련하는 자리

이승한 · TV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1/12/0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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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안 페미니즘 이야기
[미디어속 페미니즘] 다른 존재를 위해 넓게 마련하는 자리
이승한 · TV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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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2/0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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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에서 혼자만 '다른 존재'였던 경험이 다들 한 번씩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새로 발령받은 학교 교무실에 처음 들어갔는데 전교조 소속 교사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당황하는 경험 같은 거요. 저도 그런 경험을 종종 합니다. 회사원 무리 중 혼자 프리랜서인 경험, 글쟁이 무리 중 혼자 대학 졸업장이 없는 경험, 친구 무리 중 혼자 이혼가정 자녀 출신인 경험

 

 비슷한 경험을 해본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그런 상황에선 모든 행동이 다 조심스럽습니다. 그냥 '내가 나라서' 하는 행동들이, 졸지에 '대학 졸업장 없는 사람들은 다 저런가 봐',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애들은 원래 저런가?' 하는 식으로 확대해석을 당하기 일쑤니까요. 팔자에도 없이 혼자서 한 집단 전체의 속성을 대변하게 됐으니, 혹시라도 내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이 아닌 편견을 심어주게 되면 어쩌나 싶어 움츠러드는 겁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미디어가 '다양성''포용성'을 확대한다는 이유로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을 출연시키는 걸 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시도가 모두 환영을 받거나 성공한 건 아니예요. 특히나 남자들이 가득한 프로그램에 어쩌다 여자 멤버를 한 명 넣는다거나, 백인 캐릭터들이 즐비한 드라마에 아시아계 캐릭터가 한 명 포함되어 있다거나 하는 시도들은 비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무리 중에 한 명만 '다른 존재'일 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해당집단 전체의 속성인 것처럼 보이는 한계가 명확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보고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하죠. 그간 감초처럼 한 두명 나오고 말았던 아시아계 캐릭터들이 떼로 출연하는 작품이니까요.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아시아계 배우들은 비로소 '아시아인을 대표'할 필요 없이 그냥 자기인 채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아시아인이라 해도 누군가는 젬마 찬이나 헨리 골딩, 양자경처럼 우아할 수 있고, 누군가는 아콰피나나 켄 정, 로니 쳉처럼 사랑스러운 괴짜일 수 있는 거죠.

  

 지난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나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성공한 이유도 그런 겁니다. 축구하는 남자들 가운데 고명처럼 여자 멤버가 끼워져 있는 게 아니라, 축구에 미친 여자들이 우르르 나오는 프로그램이어서. 춤추는 여자 한 두명이 나와서 "여자가 추는 춤은 이런 것"이란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런 춤을 추는 여자 저런 춤을 추는 여자 수십 명이 나와서 "여자가 멋지게 추지 못할 춤 같은 건 없다"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프로그램이어서. 그래서 사랑받은 거죠.

 

 나와 다른 누군가를 존중하고 공존하는 일은 '자리 하나 내어주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가능하면 나와 다른 존재들이 충분히 자신을 표현하고 편안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더 많이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조화로운 공존의 비결이겠지요. 남자들이 가득한 자리에 여자를 위한 자리 하나 내어주고 여성에게 기회를 줬노라 말하며 만족하는 거 말고, 경력도 나이도 지긋한 사람들 사이에 20대 한 명 끼워주고는 MZ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노라 말하는 거 말고. 저는 선생님들께서 오늘날의 학생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더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나와 다른 존재를 위한 자리를 더 넓게 마련하는 마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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