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거부하니 '공산주의자'로 몰려

릴레이 기고/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을 거부합니다.

이주영·퇴직교사 | 기사입력 2020/12/15 [10:40]

촌지거부하니 '공산주의자'로 몰려

릴레이 기고/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을 거부합니다.

이주영·퇴직교사 | 입력 : 2020/12/15 [10:40]

이주영(65) 교사는 1989년 서울장충초에서 파면되어 1994년 서울성자초로 복직하였으나 서울마포초 재직 중 위암과 간 3곳에서 전이암이 발견되어 2011년에 명예퇴임을 하였다. 이후 3년 동안 투병 후 수술에 성공하였고, 현재까지 경구투약 항암제를 복용하면서 글쓰기와 강연 활동을 하고 있습다. 1988교사는 교사다부터 2019대한민국 생일은 언제일까요?까지 50여 권의 책을 냈다. 편집자주.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합니다. 전교조 서울지부 퇴직교사 모임인 서울참교육동지회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나오고, 가끔 서울 교사들이나 서울에 왔다가 동참하시는 다른 지역 분들도 계십니다. 퇴직교사인 조희주 선생님은 세월호 농성과 함께 거의 날마다 이 1인 시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서너 명이 오셔서 2m 거리를 두고 1인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저는 주 1, 12시부터 13시까지 합니다. 커다란 팻말을 앞에 세우고 서서 더 많은 사람이 봐주기를 소망합니다.

 

“31년을 기다렸다. 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시켜라!”

 

저는 1976년에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년을 미발령 임용 투쟁을 한 끝에 197737일 서울문창초등학교로 발령받았습니다. 보통 31일 발령을 받아야 하는데 일주일이나 늦어진 까닭이 있습니다.

 

 

▲ 이낙연 더불어민주당대표와 권정오 전교조 위원장, 윤병선 전교조 원상회복추진위원장 등은 해직교사 원상회복특별법 관련하여 10일 오후 5시경 면담을 했다.     ©김상정

 

 

당시는 국립교대를 졸업하면 국가에서 모두 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예산문제로 교원 총원을 늘리지 않아서 1970년 초부터는 졸업을 해도 임용이 되지 않았고, 이렇게 쌓인 발령대기 인원이 1976년에는 3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교대 졸업생은 발령이 나면 의무복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다른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대부분 과외교사나 일용 노동자로 떠돌아야 했고,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장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1976년 졸업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본 미임용자 실태를 가을에 주요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이후 이 내용은 각 신문의 취재 경쟁 속에서 대서특필되었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거론되면서 1977년 예산에 반영이 되어서 교원 총원이 늘어났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보낸 실태조사와 문제점, 해결방법의 내용은 도시 초등학급 학생 수를 법정 인원인 60명으로 줄이고, 농어촌에 많은 복식학급을 단식학급으로 바꿔서 학급수를 늘리고, 질병에 시달리는 고령 교사들은 퇴직가산금을 충분히 주어서 퇴임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조건을 반영하면서 갑자기 12000명이 증원되었고, 3년 뒤에는 초등교원이 부족해서 고등학교 졸업자나 중등교원을 보수 교육해서 충원하고, 방송통신대학교에 초등교육과를 설치해서 충원해야 했습니다.

 

초임지였던 서울문창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약 12000, 150여 학급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학교라고 신문에 날 정도였습니다. 아침 직원 조회 시간이면 담당 계원, 교무, 교감이 업무와 방침을 하달하고 교장이 훈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면 1교시 시작인 9시를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심할 경우 1교시 전체를 빼먹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 아이들은 자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반장한테 역할을 주는 것입니다. 베껴 쓰기를 시키고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이름을 적게 하고, 심지어는 직접 체벌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습니다. 이런 반교육적인 일을 못하는 담임은 무능한 교사라고 했습니다. 

 

 


저는 무능한 교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김구가 쓴 백범일지를 읽다가 끝에 쓴 나의 소원에 감동받아서 나한테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교사로 살겠다는 꿈은 갖고 초등교사로 살기기로 결심했고, 교대 다닐 때 룻소와 페스탈로찌 책을 읽고 감동받았고, 동아리 활동으로 흥사단 아카데미를 하면서 배운 안창호 교육사상에 감동받은 저로서는 도저히 그런 반교육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반은 자습시간이면 떠들었고, 때리지 않는 교사라고 아이들이 무시했습니다.

 

당시 관례였던 촌지는 더 큰 문제였습니다. 육성회 간부였던 우리 반 학부모가 담임이 촌지를 받지 않는다고 교감과 교장한테 고발하고, 교장은 내가 돈을 싫어하는 걸 보니 공산주의자 같다고 학부모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도 도대체 촌지 받지 않는 것과 공산주의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1학기 소풍을 다녀온 뒤 학년 주임이 돈을 걷어 교감과 교장에게 준다는 것을 반대하고, 교장이 권장한 책을 평균 60여 명씩 구입하는 다른 반과 달리 우리 반에서는 5명 밖에 구입하지 않자 교장은 제가 하는 일에 드러내놓고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소풍가서 찍은 사진을 아이들에게 팔아서 업자한테는 50%만 주고 나머지는 담임이 갖는걸 반대하고, 권당 20%를 담임에게 배분하는 전과 판매대금을 받아 학급문고를 샀다고 하니 일부는 좋아해주었지만 대부분은 따돌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만에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고, 세 달 만에 촌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처음 아이들을 때린 1977416일과 처음 촌지를 받았던 6월 중순 어느 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저는 촌지를 받지 않아도 따돌림받지 않고, 공산당으로 몰리지 않고, 탄압받지 않는 교단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해가 갈수록 이런 부조리에 타협을 하게 되었고, 촌지를 당연하게 받게 되었고, 무엇보다 폭력교사로 변해갔습니다.

 

저는 이렇게 늪에 빠져들면서도 이런 늪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최소한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촌지가 아니라 교사의 노동에 따른 정당한 임금을 받으면서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1980년 초 문교부에서 교사 임금 인상액을 책정할 때 초등교사들이 받는 촌지를 고려해서 낮게 책정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풍문이 아니라 문교부 정책 관련 자문회의에 갔던 대학교수가 저한테 도대체 초등학교 교사들은 촌지를 얼마나 받느냐고 물으면서 들려준 이야기였습니다. 

 

▲ 연세대에서 진행된 전교조 결성식 당시 모습  © 교육희망 자료사진


저는 이런 까닭으로 교육민주화운동에 나선 것입니다. 처음에는 뜻을 같이하는 교대 동기와 문창초 동료들하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와 서울YMCA초등교육자협의회를 만들게 되었고,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에 앞장서게 되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문교부와 정부는 이러한 우리 교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를 협박하고,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아버지를 협박하고, 함께하는 동료 교사들을 협박하고, 학부모들을 동원해서 창피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제가 옳다고 지지했고, 제가 파면되고도 여름 방학 날까지 교실에서 수업할 수 있도록 출근투쟁을 도와주었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교육 관료와 경찰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사로서의 제 목을 잘랐습니다. 1600여명 교사들 목을 쳤습니다.

 

1989년은 우리 역사에서 교육 대학살로 기억되어야 하는 해입니다. 참교육과 교육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나선 교사들을 잘라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참교육과 교육 민주화를 왜곡시키면서 짓밟았습니다. 교육을 살리자는 교사들을 내쫓으면서 아이들을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 교육은 아직도 그 어둡고 축축하고 차가운 죽음의 계곡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안개 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9년 교사 대량 해직과 교육 대학살로 수면 위로 올라온 교육문제들은 아직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교육 민주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것 같지만 속이 되어야 할 참교육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더불어 함께사는 삶을 배우는 민주교육,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인간교육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경쟁교육만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균등한 교육은 점점 더 멀어지고 점점 더 불평등한 교육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198939일 노무현 의원 제안으로 국회에서 논의와 협상을 거쳐 개정한 노동조합법을 322일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대 교육민주화에 동참했던 교사들은 1988113일 여의도 광장에서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이에 공감하는 국민 여론이 높아지면서 노무현 의원이 발의한 개정 노동조합법이 198939일 국회를 통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이 이런 과정을 거친 국회 결정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당시 정부기관 11개 부처와 시도 지방자치단체 역량을 총동원하고, 2,000억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긴급 증액하여 교육 학살에 탕진했습니다.

 

저는 교육민주화를 가로막은 19893월 노태우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거부했고, 지금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말합니다. 31년 전 군사독재 잔당인 노태우 대통령이 잘라간 제 목을 다시 돌려달라고, 곧 원상회복 시켜서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 교육과 나라와 겨레의 내일을 바르게 열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청와대 앞에서. 

 

▲ ▲ 이주영 교사(오른쪽)는 매주 하루씩 청와대 앞에서 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 이주영 퇴직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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