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눈인사에도 힘을 얻습니다.

연속 기고/ 19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해야

김우성·인천퇴직교육자협의회장 | 기사입력 2020/12/08 [15:48]

작은 눈인사에도 힘을 얻습니다.

연속 기고/ 19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해야

김우성·인천퇴직교육자협의회장 | 입력 : 2020/12/08 [15:48]

김우성(68) 선생님은 1989년 대전 보문고등학교에서 해직되었고 복직한 뒤 2015년 인천고등학교에서 퇴직하였다. 전교조 대전지부장으로, 퇴직 이후에는 전교조 인천지부 자문위원과 인천시 퇴직교육자협의회 회장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편집자주.

 

오늘도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19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합니다. 매일 한 시간씩 1인 시위를 하는 그 시간이 무척이나 깁니다. 무릎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파옵니다. 나중에는 허리도 아프더군요.

 

 

주변을 맴도는 젊은 분이 있어 사진 촬영을 부탁했습니다. 얼른 와서 기꺼이 찍어주고는 전교조 해직교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42살이고, 정보과 형사랍니다. 결성과정에서 1527명 또 사학 민주화 및 원회추 관련 해직교사까지 합치면 1800여 명이 될 거라고 했더니 기가 막히다는 표정입니다.

 

젊은 정보과 형사가 떠난 뒤에도 기가 막힌 듯한 그 얼굴, 이해가 안 된다면서 짓던 그 표정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그 젊은 형사와 비슷한 또래일 현장조합원들이 1987년 전후의 교육현장과 시대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 시대를 다룬 책이나 영화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이 전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 중인 김우성 퇴직교사  © 김우성 퇴직교사 제공

 

 

 

학생 : 선생님! 김대중이 간첩인가요?

교사 : 아닐 수도 있지…….

 

교사는 다음 날 중앙정보부로 끌려갔고,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름하여 좌익 의식화 교사가 된 것입니다. 얼마 후 그 교사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름을 오른이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좌익이 아니다.’란 절규였지요. 이렇게 수업 중이나 쉬는 시간에 학생들 질문에 답했다가 또 다른 학생이나 학부모들 신고로 곤욕을 치른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그 시절, 사립 학교에서 여교사는 결혼과 동시에 퇴직해야 했습니다. 아예 채용 때부터 결혼하면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두거나 심지어 백지 위임장을 받아두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공립 학교에서도 여교사가 법정 출산휴가 90일을 다 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출산휴가 대체강사료를 자신의 봉급으로 내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교사는 평일 밤에 학교를 지키는 숙직, 여교사는 토요일과 일요일 당직을 했습니다. 교사들 교무 수첩을 검열받던 일들은 지금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 결성대회 참가를 위해 한양대로 왔지만 연행되는 교사들     ©전교조 자료사진

 

 

학급당 학생 수 60여 명인 콩나물 시루같던 교실, 여름엔 선풍기 하나 없던 찜통 교실, 학교에서 교육청에 학생을 문제아로 보고하면 그 학생은 삼청교육대를 갔다 오던 시절입니다.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 때 만든 삼청교육대에 고등학교 학생까지 끌고 가는 그런 일이 당시의 교육현장이었다는 걸 요즘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에 촌지와 부교재 채택료 문제도 있었지요.

 

- 촌지를 받지 말자

- 때리지 말자

- 통일교육을 하자.

- 공부를 하자.

 

이것들은 교육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해 1987년에 만들었던 민주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신문에 실렸던 당시 교사들의 요구였고, 실천 과제였습니다. 이런 과제들을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란 말로 표현하였고, 참교육이란 말로 상징화했습니다.

 

이런 불합리와 비리를 걷어내고 교육 민주화로 참교육을 실천자는 마음으로 우리는 1989년 전교조를 결성했습니다. 민주화 추진을 위한 전국교사협의회를 정부가 공식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단체협상은 물론 대화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법에 따라 노동 3권을 확보할 수 있는 노조를 결성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노태우 군사정권은 안기부와 교육부를 앞세워 온갖 폭력을 가해왔습니다. 그 결과로 40여 명이 구속되고, 1527명이 교단에서 쫓겨나와 거리의 교사가 되었던 것이지요.

 

▲ 전교조 결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결성대회 장소를 찾았다가 경찰에 연행된 교사들은 유치장에서 각각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전교조 결성식을 진행했다. 사진은 당시 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치러진 결성식     ©전교조 자료사진

 

 

그런 국가폭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전교조를 지키기 위해 700여 명이 모인 명동성당의 단식투쟁, 1,000여 명이 집결했던 광주, 부산, 울산의 해직교사 단결 투쟁도 있었습니다.

 

 

울산 투쟁에선 교사들이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교사들은 이러한 불법 연행에 항의하는 의미로 모두가 묵비권을 행사하며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경찰서는 연행된 교사들을 가두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교사들의 집단 농성장으로 바뀌었고, 지부장들을 중심으로 항의 협상단을 구성해서 경찰서로 찾아갔습니다. 경찰서장은 제발 농성을 풀고 데려가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저는 울산 북경찰서 협상단으로 갔었는데, 농성을 풀고 경찰서에서 나가는 조건으로 연행 과정에서 찢긴 옷 1센티마다 1만 원 보상, 저녁과 아침식사 제공, 울산역까지 버스를 대절해 줄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습니다.

 

해직 5년이 지나고 19943월 특별채용형식으로 다시 교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해직 기간의 세월은 잃어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 감내해 왔습니다만 늘 허전했습니다. 남의 자식 잘 가르치자고, 내 자식은 팽개치냐는 식구들의 원망하는 말이 늘 귓가에 맴도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해직된 지 31년이 되었습니다. 정년퇴직한 지도 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인천시교육청 앞에서 잃어버린 내 세월을 돌려달라고 손팻말을 들고 있습니다. 오고 가는 교육청 직원들 속에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쳐다보면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한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그래도 첫날 두세 사람과 목례를 주고받았는데, 계속하니 조금씩 늘었습니다. 지난번 1인 시위가 끝나고 생각해보니 열두 분 정도가 목례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가운데 두 명의 여성이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해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제가 먼저 인사를 합니다.

 

▲ 연대단체들과 함께 요구하는 해직교사 원상회복  © 김우성 퇴직교사 제공

 

 수고들 하십니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이런 관심들로 힘이 납니다. 또 요즘은 해직 당사자는 아니어도 퇴직 교협 회원들과 인천 시민단체 회원들이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런 날은 한 시간이 짧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서로 격려하면서 이어지는 관심이 이 운동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해직교사 원상회복, 이것도 이 시대의 정의를 실현하는 또 하나의 작은길이라 믿기에 저는 1인 시위에 나갑니다. 무릎이 아프고, 발바닥도 아프고, 나중에는 허리도 아파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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