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침설 교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강성호·충북 상당고 교사 | 기사입력 2020/12/04 [15:35]
특집기획
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
'북침설 교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릴레이기고/ 1989년 전교조 결성 저지를 앞세워 자행한 국가폭력
강성호·충북 상당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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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2/0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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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기고/ 1989년 전교조 결성 저지를 앞세워 자행한 국가폭력

강성호 선생님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9년 충북 제원고에서 수업 중 북침설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당시 경찰과 학교는 학생 6명에게 이 같은 내용을 거짓으로 증언하도록 했고, 수업을 받은 학생 359명은 두려움 속에서도 수업 중에 북침설을 들은 기억이 없다.’는 탄원서에 이름을 올렸으나 묵살당했다. 편집자주.

 

나는 19893, 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푼 가슴으로 교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고향 경남 진주를 떠나 학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겠다는 각오로 부임한 학교는 박달재 너머에 자리 잡은 충북 제원고(현 제천디지털고교)였다. 부모 형제 곁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 재심을 앞두고 청주지방법원 앞에 선 강성호(충북 상당고)와 서유나(충북 수곡중) 부부 교사  © 강성호 교사 제공

 

 

학교에서 받은 차별대우를 눈물로 호소하던 학생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작은 용기를 내어 교무회의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그런 행동은 교장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학교 현장 분위기로 인해 나는 차츰 교장 눈 밖에 난 이른바 찍힌 교사가 되었다. 

 

초임 교사이면서도 전교조 결성 추진위원회에 가입하였고, 학습지도안 검열 폐지 의견서 제출, 반강제적인 자율학습비 납부 반대, 각종 성금 지출 명세 공개 요구 등 학교 민주화 요구에 나서자 교장, 교감은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교감은 내가 학교에서 외부로 전화하는 것조차 못하게 막았고 하숙집까지 와서 사생활을 감시하였다. 

 

교장은 수업하는 교실에 들어와 학생들 노트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내가 보는 앞에서 확인하고 기록하였다. 심지어 각 반 실장 부실장을 교장실로 불러내서 무슨 내용을 가르쳤는지 보고하라고 하였다. 학교에서는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편향된 의식화 교육을 시도하는 일이 있다. 학생들 학습 내용을 살펴본 뒤 이상이 있으면 바로 학교로 연락해달라.’는 내용의 학부모 통신문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교육법 75교사는 교장의 명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1999년 폐지) 때문이었다.

 

전교조 결성을 앞둔 1989524일 오전, 3학년 교실에서 일본어 수업을 진행하던 나는 학교장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실에는 건장한 체격의 낯선 남자 2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신원을 확인한 그들은 조사받을 일이 있으니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학생 관련 사안으로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학교장도 학생들 일이니 당연히 협조하겠다고 했다. 두 남자는 나를 현관으로 데려갔다. 현관 앞에는 검은색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학생들이 차 주위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다음 시간 자습을 부탁하고 차에 올랐다. ‘선생님, 금방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학생들에게 태연히 손을 흔들며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나는 그날 이후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 전교조와 교육민주화동지회는 지난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강성호 교사의 국가보안법 유죄 판결을 재심에서 바로잡고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전교조 충북지부 제공

 

 

두 남자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제천경찰서 대공과였다.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그제야 뭐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 나는 무슨 일이냐고 항의했다. 수사관들은 당신은 학생들에게 6·25전쟁을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가르친 혐의를 받고 있다.’며 순순히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그들은 자술서 작성을 거부하는 나에게 학생들이 이미 증언을 했으니 순순히 자백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그런 사실이 없으니 쓸 수 없었다.

 

내가 31시간 동안 외부와 철저히 차단당한 상태로 대공과 취조실에서 홀로 버티는 동안 학교 지시를 받은 일부 학부모들은 제천교육청에 와서 나에게 자녀를 맡길 수 없다며 농성을 하였고, 언론에서는 나를 북침설 교육을 한 교사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내가 구속되던 19895월은 교육개혁을 바라던 교사들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을 앞두고 있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공포감을 조성하며 교사들을 마구잡이로 줄줄이 구속하던 시기였다. 전교조 결성에 동조하는 교사들에게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가짜여론을 일으켜 전교조 결성을 막기 위해서 꾸민 일이었다. 내가 끌려간 그 날 조태훈 서울 인덕공고 교사도 1년 전 술자리에서 동료 교사에게 북침설을 말했다는 이유로, 이수찬 경북 영주 동산여중 교사는 이틀 뒤인 526일 한 여학생이 김일성을 만나보고 싶다고 쓴 낙서를 버려뒀다면서 각각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공안 당국의 그물에 걸려든 조태훈 교사와 이수찬 교사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승소하여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이미 여론을 통해 위와 같은 내용이 기정사실처럼 알려진 뒤였다. 나는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았고, 8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판결을 확정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돌아보면 사법 농단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태우 정권을 비롯한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나에게 북침설 교육 교사라는 누명을 씌우고, 이를 내세워 전교조를 좌경용공집단으로, 참교육을 종북 교육으로 내모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이를 여론몰이 도구로 악용하였다. 

 

1989711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나란히 라디오 방송문을 통해 노조결성을 주도하는 일부 교사들이 이른바 참교육을 내세워 ‘6.25는 북침이다. 현 정부는 반통일 세력이니 줄기찬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라고 그릇되게 가르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라는 새빨간 거짓말로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교원노조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밝혔다. 언론에서도 공안정국을 주도한 검찰 자료를 인용하여 참교육은 삼민투 이념과 대동소이하고 참교육을 주장하는 교사들 가운데 6.25가 미군에 의한 북침이라 교육한 사례가 적발되기도 하였다.’는 가짜뉴스를 보도하였다.

 

북침설 교육의 실상은 무엇일까? ‘북침설 교육 교사라는 이유로 연행된 나는 그날 새벽 대공과 취조실에서 내가 수업 중 ‘6·25가 북침이라고 가르쳤다.’고 거짓 증언한 제자들을 만나야했다. 불과 몇 시간 전 교실에서 함께했던 제자가 스승인 나를 간첩이라 증언하는 현실 앞에 나는 절망감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그들 중 두 명은 자신이 북침설 교육을 들었다고 증언한 그 날 수업에 결석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출석부를 통해 밝혀졌다. 나머지 학생들의 증억 역시 신빙성을 의심할 만큼 오락가락했다. 반면 내가 그런 말을 한 적도, 가르친 적도 없다고 증언하는 탄원서를 낸 학생은 359명이었다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재판부는 학생 359명이 선생님은 죄가 없다.’며 제출한 탄원서는 외면한 채 결석생 2명을 포함한 6명의 거짓 증언을 인정하여 나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 강성호 교사가 재판장에 들어설 때 가지고 간 이 재판관련 서류가 두툼하다. 재심 재판부에 제출한 서류로 보인다. 대법정에 들어서 본 재심재판부 판사석 앞에는 누렇게 색이 바랜 원 사건 재판 서류. 그 위에 놓인 두툼한 재심재판 서류, 제출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서인     ©김상정

 

 

 

그렇게 나는 교직에 들어선 지 단 두 달 만에 교단을 빼앗겨야 했다. 그 후 해직교사로 지낸 10여 년 동안 나에게는 빨갱이 교사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하나뿐인 동생은 형의 누명을 벗기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에 깊이 좌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잇따른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전교조 상근자로 복무하며 빼앗긴 교단을 향한 꿈을 고이 지켜오던 나는 19999, 해직된 지 104개월 만에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교실로 돌아온 나는 가슴에 품어온 열정을 학생들과 나누며 일본어 교사로서 전문성 신장과 학생생활지도에 전념해왔다. 특히 한일고교생 교류 활동과 한일교사 공동 연구수업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시민교류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았고 박근혜 정부 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최한 한일교사 공동수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17년에는 평교사로는 최초로 충북도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단재교육상 사도 부문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나열하는 것은 수상 실적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적재적소에서 대한민국의 교육 발전을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던 이름 없는 교사들에게 국가가 빨갱이니, 용공 분자니 하는 굴레를 씌워 교단에서 내모는 폭력을 자행한 지난 세월이 정상이었느냐고 준엄하게 묻는 것이다.

 

31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보안법 수형 번호 279라는 주홍글씨는 내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해직된 지 30년이 되던 2019528일에 나는 청주지방법원에 19895월 북침설 교육 사건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고 법원은 1128일 재심 결정을 내렸다. 30년 전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이 자행한 불법 연행과 불법 구금을 법원에서 고스란히 재심사유로 인정한 것이다. 재심 첫 공판이 2020130일 열렸고, 4차 공판까지 진행됐다. 나는 1217일 다시 5차 법정에 설 것이다. 내가 이렇게 힘든 재심의 길을 걷는 까닭은 31년 전 법정에 출두하면서 내 손바닥에 썼던 진실승리를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원상회복 촉구 1인 시위에 동참하는 까닭도 역사의 진실이 거짓과 폭력을 이긴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 충북도교육청 앞에서 89년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제정 촉구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강성호 교사 제공

 

 

아직도 제가 북침설 교사입니까?”

2020년 12월 17. 31년 만에 재심 법정 피고인석에 앉은 나는 국가에 큰 소리로 묻겠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절규하듯 외치는 이 물음에 과연 어떤 답변을 내놓을까?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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