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나는 고3이었다. 26일 밤, 고등학생은 나가라는 말에 도청을 나왔다. 그래서 아직까지 살아있다. 오늘은 5.18 40주년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 있다. 미치겠다. 피흘리면서 싸운 사람들은 여기 있는데 그 이름을, 그 투쟁을, 그 정신을 오늘 민주당이 다 가져가고 있다. 의미를 훼손시키지 말라"
2020년 5월 18일, 김종선 교사가 민주당사 앞에서 열린 '교원노조법 개악 저지' 집회에서 한 말이다. 5.18 당시 전남도청 안에서 총을 들었던 고 3학생은 40년이 지난 2020년 현재, 전교조 법외노조로 인해 해고된 34명의 해직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 80년 5월, 시민들을 향해 총격이 가해지면서 총에 맞는 친구를 보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고 시민군이 되었다.
가난을 이고 태어난 삶을 바꿔보려고 대학에 가고자 했던 고3 학생에게 5.18은 '어떻게 살 것인가'란 화두를 던졌다. 80년대 대학에서 인문학을 읽고 토론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눈을 떴고 함께 할 동지도 만났다. 불의한 세상에 맞서 치열하게 살았던 삶은 함께 했던 동지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한없이 무너져내렸다. 현실을 떠나 찾은 절간.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절간 세상 또한 그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찾아온 화두였다. 그는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하고 내가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아이들이 겪고 살아갈 미래를 함께 이야기를 해보는 게 의미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90년 2월이다.
"좋다. 그 학교 가서 전라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겠다." 당시 비호남권출신 남자교사를 구한다는 채용공고문을 낸 천안 복자여고, 학교장을 찾아가 공고문에 대해 항의하던 자리에서 급작스레 근무 제안을 받고 5일 만에 그 학교 교사가 됐다. 그는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공개사과를 요구했고 한 달 후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28살 때 이야기다.
'교사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온갖 규제와 벌칙, 자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풍물, 시, 토론 모임 등을 만들었다. 학교신문반을 꾸렸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스스로 학생회를 꾸렸다.
그는 교사로서도 의견을 갖고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늘 학생들 곁에 있었다. 학생회에서 학교 규칙 개정을 주도했다.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은 교사들이 만든 것보다 더 엄격했지만, 그 이후로 교사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매를 드는 일은 사라졌다.
이어 지역 학생회 연합으로 처음 시도한 지역 학생의 날 행사도 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러다가 99년도에 사립학교 비리 문제에 눈을 떴고 사립학교법 개정 투쟁이 한창이었던 시기, 사립학교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전교조를 처음 알게 된 건 절에 있을 때다. 굴비 엮듯이 끌려나가는 교사들의 모습을 뉴스로 접했다. 교사가 되자마자 전교조에 가입했고 2013년에 전교조 본부 사립위원장과 부위원장을 하면서 사학민주화투쟁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해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전교조 전임자에 대한 해고 위협이 눈앞에 닥쳤고 그는 법외노조를 막다가 해고된 34명의 해직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
2013년에 학교를 나와서 8년째 못 돌아가고 있는 그는 이제 3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나면 정년을 맞이한다. 전교조 교사로 살아온 삶도 어느새 30년이 흘렀다.
"참, 너무 바쁘게 살았고 정신없이 살았다."라고 말하는 그는 2020년 5월 20일,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처분' 공개변론이 열리는 대법원 정문 앞 한켠에서 간절한 바람을 전한다. "법외노조 취소가 되고 내년 3월 복직해서 처음에 아이들과 함께 했던 일들을 마지막으로 해보고 정년을 맞이하고 싶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