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당신은 매화꽃을 닮았습니다.

김영선·남원도통초 | 기사입력 2019/09/0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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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당신은 매화꽃을 닮았습니다.
이복순 선생에게
김영선·남원도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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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0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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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순 선생에게

 

이복순 선생은 독재정권이 서슬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80년대 초 교단에 섰다. 87년 전국교사협의회 결성과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함께했다. 전교조 전북지부 초대 여성위원장으로 학교 안팎의 성폭력 사안 해결에 맞서 싸웠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부당한 학교현장을 바꾸기 위해 앞장섰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폭력에 눈감지 않으며 고통받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위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9월 현재, 그에게 찾아온 병마로 세상과의 작별을 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전교조 결성으로 함께 해직된 뒤 부부의 연을 맺고 그 모든 시간을 함께 지내온 이종천 선생은 이복순 선생의 곁을 지키며 동지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복순 선생의 삶의 한복판에서 함께 투쟁해왔던 김영선 교사는 지금, 아름답게 삶의 끝자락을 걷고 있는 이복순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편집자주

 

[9 10 12:00 추가이복순 선생(전주우아중학교) 9 10일 오전 7 44분 별세했다장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북지부장으로 치러지고, 9 11일 저녁 7시에 전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의 밤이 열린다.

 

교육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우아중학교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참으로 행복했다그 아이들과 함께 정년퇴직을 맞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 많이 아쉽다그리고 나 대신 한 사람 더 가입시켜야 되는데....”

 

이복순 선생이 전교조 전북지부 활동가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  이복순 선생과 김영선 교사는 전남 광양 어디메쯤 매화꽃이 활짝 핀 나무 아래서 함께 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김영선

 

꿈 속에서 언니는 복숭앗빛 얼굴색으로 쇠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이제 다 나았어. 이렇게 훨훨 잘 걷잖아!” 언니는 씩씩하게 걸으며 내 차를 타고 부산에 가자고 하였다.

 

남원에 있는데 언니가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는 문자를 받았다. 언니는 눈을 떴다가 감으면서 의사 표현을 하였다. 한참을 같이 있다 보니 언니는 어서 가라고 겨우 한마디를 하였다. 내일 출근하는 우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오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언니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니까. “애썼어!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처음 모습과는 달리 언니의 눈은 맑고 고왔다.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흔드는데 얼굴이 펴지며 아름다워졌다.

 

여름방학 동안 언니가 많이 아프다고 하였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전화를 했더니 하느님이 이제 나를 데려가려나 봐.”답했다. 언니는 몸이 미라보다 더 말랐다고 하면서도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복순 언니는 우리 언니 빼고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이복순 선생님은 나와 다섯 살 차이가 난다. 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친다. 우리는 18년 전에 만나 전교조 전북지부 여성위원회를 같이 했다. 전임자를 세우지 못해 여성위원장을 번갈아 가며 했다. 북한 김정은도 아닌데 위원장을 독점하고 있다고 한탄을 하였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어 번갈아 했다.

 

복순 언니와 나는 아이가 셋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연히 교육비와 생활비 걱정을 많이 했다. 나와 다른 것이 언니에게 있다. 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과학 교사라 아주 논리적이다. 춤을 잘 추어 아이들과 함께 대회를 나갔다고 자랑도 하였다. 교육정보과학원 앞에서 한 달 넘겨 집회를 꾸렸고, 성폭행 규탄 집회장에서 교육현장은 청정지역이어야 한다고 외쳤다. 보건휴가 쟁취 투쟁, 육아시간 확보, 생리로 인한 결석 출석 인정, 차 심부름시키는 교장 규탄대회, 성폭력 사건 가해자 규탄대회 등 함께 했던 사업이 많았다. 6월이면 여성위원회에서 버스를 빌려 전국 기행을 많이 갔다. 통영 윤이상 선생 생가, 한승원 작업실, 파주출판단지와 건축기행, 곡성기차마을,.... 우리가 기획한 기행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이 많아졌다.

 

매화꽃을 보러 갔다가 꽃이 피지 않아 되돌아 나오기도 했고 곡성 기차 마을에서는 기차를 타고 강변에서 놀았다. 복순 언니와 나는 작년 어느날 꼭 매화꽃을 보자고 다짐하며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마을 근처부터 막혀 거북이 운행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꾸벅꾸벅 졸아도 차는 그대로였다. 마을 들어가는 주변에는 사방천지에 매화가 피어 있었다. 차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복순 언니는 인생에 스톱이 없는 사람처럼 조금만 참으라고 하였다. 기력이 없는 언니는 옆에서 자고 있었다.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마지막 소풍을 떠나는 사람처럼 우리는 들떠 있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섬진강이 흐르는 언덕으로 내려가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복순언니 남편 이종천 선생님이 싸 준 유기농 반찬 도시락이었다. 밥을 먹고 사진을 찍었다. 오후가 되어 매화마을에 도착하였다.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우리는 매화마을을 천천히 걸어 마을 윗동네 홍쌍리 집의 항아리 무더기를 봤다. 파전을 먹으러 들어갔다. 언니는 암으로 위를 다 들어내고 나니까 파전에 있는 오징어만 봐도 좋다고 하였다.

 

나는 사람하고 담을 쌓고 사는데 언니는 학부모, 학생들과 소통을 잘하고 산다. 그 비결을 물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학부모들과도 친하게 지내, 같이 해결하면서 사는 것이지. 내가 먼저 상처를 받지 않아야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 먼저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그게 상처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지. 문제를 같이 푸는 방법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의논해 보면 답이 있어. 내가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야.”

조금 내려놓고 사람과 부대끼고  살라는 말에 나는 노력을 하기로 했다.

 

건강하고 목소리가 큰 이종천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집안일을 해 오고 있다. 언니가 관절염을 앓아 아침이면 손이 펴지지 않아 식사 준비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가사노동을 남편이 하게 되어 병으로 복 받았다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술을 많이 먹는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언니가 올봄 나에게 깨떡을 보내줬다. 검은 깨떡 두 박스가 왔다. 할아버지가 헬멧을 쓰고 와서 사무실에 놓고 급히 나가려고 했다.

누가 보낸 거예요?“

하고 묻자 노인은 얼버무렸다. 아니. 누구라고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직원이 창문을 열고 운동장을 내다봤다.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떡 상자는 토마토와 딸기 상자 그림만 있다. 어디에도 떡집 연락처가 없었다. 물론 나에게 온 문자도 없다.

 

이게 내 떡인지 알 수가 없다. 궁금하였으나 다른 일로 바빠 곧 잊었다. 퇴근 후 남은 깨떡을 들고 순창으로 넘어갔다. 먼저 발령 난 친구에게 업무를 배우고, 이참에 얼굴도 보러 갔다. 우리는 일이 끝나 국수를 먹으러 갔다. 그때 전화가 왔다.

 

복순이 언니였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직장에 가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직원들은 이렇게 맛있는 깨떡은 처음 먹어 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언니 고마워요.”

 

두어 달 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보고 싶다고 놀러 오라고 했다. 퇴근 후 병원으로 찾아갔다. 최근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별 일 아닌 줄 알았다. 언니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입구까지 따라 나오며 밥을 못 먹어서 어떻게 하냐며 가는 나를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는 병원에서도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내 고민은 사람 사이에 담을 치고 사는 것인데 언니는 달랐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도 과일을 그릇에 담아오며 먹으라고 하였다. 언니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게 부러웠다.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문을 닫다가 손가락을 다쳐 병원에 입원 했을 때 찾아 가보니, 병실 사람들과 아주 오래전부터 친한 사람들처럼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병실 안 사람들이 모두 언니를 좋아했다. 거기에는 선생 이복순은 없었다. 사람 이복순이 있었다.

 

매화가 피려면 아직 멀었는데. 교육환경 청정지역을 외쳤는데. 복순 언니는 평교사로 마지막까지 교단을 지켰던 강단 있고 항상 따뜻한 사람이었다. 여교사들이 오늘날 혜택을 누린다면 이복순 선생님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였던 이복순 선생님, 복순 언니! 지금도 함께입니다.

 

▲ 이복순 선생은 전교조 결성 25주년이 되던 해인 2013년 10월 25일, 피켓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OECD가입할 때는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합법화시켜준다며 세계 각국에 손을 내밀었었지.이제는 자기들이 교단에서 거리로 내몰은 해직조합원 9명에게 조합원 자격준다고 법외노조라네. 그동안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로 전임교사 월급줬는데 전교조 덕분에 국가는 돈을 많이 벌었는데 국민들은 잘 모르실거야. 경력이 많은 전임교사 대신 학교에서 근무하신 샘들이 젊어 봉급 차액이 연간 15억 정도는 될 것이야. 그 돈은 전부 우리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가 국고로 가게 된 것인데 14년이면 200억!!전교조 지원해줬다고 생색 많이 내고, 아빠는 419교원노조 군사쿠테타로 밟아 없애더니 그 아버지에 그 딸이네. 임의단체인 전국교사협의회 불법단체라며 1500여교사를 거리의 교사로 지낸 세월 생각하면 법외노조라고 지칭하면 우리는 더욱 단결하리라. 학생과 학부모 국민과 역사 앞에 비장한 각오 속에 참교육을 위해 더욱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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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c 2019/09/11 [11:17] 수정 | 삭제
  • 선배 동지의 투쟁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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